평화로 가는 길, 34도의 무더위도 막을 수 없다
평화로 가는 길, 34도의 무더위도 막을 수 없다
  • 박가경ㆍ박정윤ㆍ김민재 기자
  • 승인 2024.09.03 12:45
  • 호수 15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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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1991년 8월 14일, 당시 67세 고(故) 김학순이 ‘일본군성노예제 피해 사실 기자회견’에서 그동안 묵혀왔던 진실을 밝혔다. 광복 이후 46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나 말고 한 사람만이라도 더 고백하면 좋겠다”던 그녀의 간절한 외침은 240명에 달하는 피해자들의 증언을 끌어냈다. 첫 증언이 있고 난 다음 해에는 수요시위가 시작됐다. 어떠한 방해나 궂은 날씨에도 굴하지 않고 목소리를 냈다. 지난 8월 14일은 1661차 수요시위가 열리는 날이자, 열두 번째 세계 일본군‘위안부’ 기림일이었다. 본지는 열기로 가득 찬 수요시위 현장에 함께했다. 

 

‘위안부’라는 이름에 담긴 비극적인 역사

일본군성노예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이 구축한 강제 성매매 시스템이다. 전쟁이 한창이던 1930년대 초, 일본군은 점령 지역을 대상으로 강간 사건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점령국들의 반일 감정이 피어났고 군인들에게 성병까지 생기자, 일본은 식민지 및 점령지 여성들을 강제 동원해 성 착취했다. 위안소의 시작이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여성이 인신매매, 협박, 폭력 등의 방법으로 강제 동원됐다. 이를 거부하거나 도망치려는 피해자들은 심각한 폭행과 고문을 당했다.

광복 이후 꿈에 그리던 고국에 돌아왔지만, 피해자들이 마주한 건 또 다른 가해였다. 피해 사실을 고백할 수 없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됐다. 46년이 지나서야 첫 증언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 따르면 ‘말하기’는 피해자에게 치유의 시작이자, 성폭력을 수치심이나 피해자의 책임을 전가하는 한국 정서에 맞선 저항이다.

우리는 일본군성노예제를 단순히 ‘위안부’라고 부를 때가 있다. 하지만 이는 ‘위로하며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여성’이라는 뜻이다. 즉 위안부는 가해자의 시선으로 본 단어다. 따라서 우리는 범죄의 주체인 일본군을 명기하고 위안부를 작은따옴표 안에 넣어 피해자를 일본군‘위안부’라고 부르거나,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라고 지칭해야 한다.

 

군용트럭으로 이동하는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들. 제공=정의기억연대
군용트럭으로 이동하는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들. 제공=정의기억연대

수요시위에서 외치다

수요시위는 일본군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32년 동안 운영되고 있다. 1992년 1월 8일 미야자와 전 일본 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시작된 수요시위는 일본군성노예제 문제에 대한 진상 규명과 법적 책임, 그리고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 회복을 요구해 왔다. 이들이 일본 정부에 요구하는 사항은 ▶전쟁범죄 인정 ▶진상규명 ▶공식 사죄▶법적 배상 ▶책임자 처벌 ▶역사 교과서에 기록 ▶추모비와 사료관 건립이다. 하지만 이는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수요시위가 1660차가 넘게 진행 중인 이유다.

수요 시위는 일본대사관 인근 도로인 ‘평화로’의 일부를 막아 진행됐다. 도로 앞쪽엔 전광판이 달린 트럭이 세워져 있고, 그 앞으로 시위자들이 길게 줄을 지어 앉았다. 평일 오후, 34도라는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모였다. 시위 현장에는 참가자 외에도 경찰들과 수많은 취재진이 있어 상당히 붐볐다. 인도 한쪽에서 나눠주는 종이선캡과 전단지가 시위의 시작을 알렸다.

시위의 첫 순서는 성미산 학교 8학년 학생들의 공연이었다. 그 뒤론 연대 발언이 이어졌는데, 유독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양서고등학교 일본군‘위안부’ 인권 수호 동아리 햇담의 학생들은 학교 수업 중 일본군성노예제에 대해 알게 됐다.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진실 규명에 도움이 되고자 동아리를 창설했다고 한다. 일본군성노예제는 이제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깊이 있게 문제를 알아보고 관심을 가지는 사람을 찾기는 여전히 어렵다. 반면 이 학생들은 책상을 벗어나 수요시위 현장으로 향했다.

정의기억연대 이나영 이사장은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최초 피해 고백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열악한 상황을 얘기했다. 연설이 계속될수록 수요시위의 온도는 높아졌고, 기자 역시 공식 사죄·법적 배상이 적힌 피켓을 힘차게 흔들고 외쳤다.

 

용기의 파도, 평화라는 해일

1시간 30분가량의 수요시위가 끝난 뒤, 그 열기는 나비문화제 부스와 무대 행사로 이어졌다. 대학생역사동아리연합, 한베평화재단, 동두천옛성병관리소 등 많은 단체가 참여해 총 18개의 부스를 운영했다. 이들은 일본군성노예제 문제뿐만 아니라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성폭력이나 국가가 성매매를 독려했던 역사를 간직한 성병관리소 등 다양한 이벤트를 통해 관심이 필요한 사건을 알렸다.

그중에서도 눈에 띈 행사는 ‘나의 파도, 마법카드 뽑기’와 ‘평화의 소녀상 지키기 캠페인’이었다. 카드 뽑기 행사에선 타로를 컨셉으로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를 알렸다. ‘평화의 소녀상 지키기 캠페인’은 ‘추모비 건립’의 일환으로 세웠던 ‘평화의 소녀상’이 테러로 몸살을 앓자 시작한 캠페인이다. 부스에선 평화의 소녀상의 의의를 알리고 보호에 앞장서 줄 것을 부탁했다.

 

피켓을 들고 있는 수요시위 참여자.
피켓을 들고 있는 수요시위 참여자.

세계 일본군 ‘위안부’를 기리다 

이어 부스 행사에 참여 중인 사람들을 만나 봤다. 평화나비네트워크란 단체에서 대표로 활동 중인 백휘선(25)씨는 2019년부터 수요시위에 참여했다. 그는 “수요시위에 나와 할머님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며 교과서에 있는 내용이 다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2005년부터 수요시위에 참여한 임계재(70대)씨도 만났다. 그는 “내겐 수요시위가 일상이 됐다. 지난 20년간 특별한 일정이 없는 날이면 어김없이 이곳에 왔다”며 수요시위에 남다른 애정을 표했다. 그는 “7~8년 전까지만 해도 찬물 하나 사먹을 형편이 안 됐다”고 수요시위에서 있었던 어려움을 말하기도 했다.

부스 현장 앞 도로변에선 소수의 역사 부정 세력이 확성기를 통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기자에게까지 전단지를 나눠줬다. 행사에 차질이 생길 정도는 아니었지만, 지난 수요시위의 어려움이 조금은 이해됐다.

시위 참여자들은 입을 모아 역사 부정 세력에 대한 고충을 언급했다. 백 씨는 “역사 부정 세력이 등장했을 때가 코로나와겹쳐서 더욱 힘들었다”고 말했다. 대학생 신유진(26)씨는 “역사 부정 세력이 수요시위 옆에서 소음 공세를 펼친 날도 있었는데, 과연 다른 입장을 존중하는 태도일지 의문이 든다”며 수요시위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에 대해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피해자의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과 목소리 내기를 방해하는 사회에 ▶자료수집 ▶모니터링 ▶기록 남기기▶분석하기 등의 인지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오후 6시 30분부터 진행된 무대 행사에서는 영상으로나마 일본군성노예제 피해자들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이용수(96)씨는 시위 참여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일본군성노예제 문제는 기필코 해결해야 한다”며 당부했다.

 

Epilogue

제3자 변제안, 사도광산 유네스코 등재, 독립기념관장 취임 이후 취소된 광복절 행사 등 제79주년 광복절은 이념 논쟁의중심이 됐다. 광복절 하루 전날, 평화로는 보통의 수요일보다 더 뜨거웠다. 바닥의 높은 지열도, 내리쬐는 햇빛도 시위의열기보다 더하진 않았다. 그토록 바라던 광복에도 편히 웃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1991년8월 14일, 고(故) 김학순의 일본군성노예제 피해 사실 공개 증언으로 시작된 수요시위의 발걸음은 세상이 평화로 뒤덮일때까지 멈추지 않고 나아갈 것이다.

 

 

박가경·박정윤·김민재 기자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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