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배려와도 거리 멀어”
제578돌 한글날 계기로
한글의 소중함 되새겨야
Prologue
김단국(74·가명)씨는 손자의 생일 기념으로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 번화가에 들어서자, 김씨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대부분의 간판이 외국어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손자 단신(5·가명)이는 알 수 없는 외국어 간판을 보며 “할아버지, 이건 무슨 말이에요?”라 물었다. 그 질문에 김씨는 대답할 수 없었다.
길거리 뒤덮은 외국어
옥외광고물 시행령에 따르면 광고물의 문자는 한글로 표시해야 하며, 외국어로 표기할 때 특별한 사유가 없을 시 한글과 병기해야 한다. 외국어로만 표기된 간판은 불법인 것이다. 그럼에도 별다른 단속이 이루어지지 않아 여전히 외국어 간판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한글학회 연구이사 김슬옹 교수는 “징벌성 세금 같은 단속이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바로잡기 힘들다”고 말했다.
2019년 ‘한글문화연대’가 12개 자치구 7572개 간판을 대상으로 조사한 한글 표기 실태에 따르면, 외국어 간판은 1704개였고, 외국어와 한글을 병기한 간판은 1102개였다.
본지는 우리 대학 주변 번화가의 간판 실태를 살펴봤다. 먼저 죽전캠 인근 번화가인 보정동을 찾아갔다. 대부분의 식당 간판이 영어로 돼 있었다. 일본어, 중국어 등 다양한 언어 간판도 자리 잡고 있었다. 식당뿐만 아니라 카페, 옷 가게 등에서도 외국어 간판을 보기 어렵지 않았다. 오직 한국어로만 채워진 간판을 찾긴 힘들었다. 외국어 간판으로 된 가게를 방문한 백민희(28)씨는 “영어를 썼을 때 고급스러워 보인다고 생각해 외국어 간판을 사용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천안캠 인근 번화가의 상황은 어떨까. 두정역에서부터 먹자골목에 이르기까지 죽전과 마찬가지로 외국어 간판들을 다수 확인할 수 있었다. 영어뿐만 아니라 스페인어, 일본어 등 다양한 외국어들이 사용되고 있었다. 어떤 건물은 간판 5개 중 3개가 외국어 간판인 곳도 있었다. 두정 먹자골목에서 만난 정민형(26)씨는 “가게의 간판을 포함해 모든 것이 외국어로 된 가게를 본 적이 있다. 그 가게에 들어가기 전까지 무엇을 파는 곳인지도 알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외국어 간판이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된 것을 우리 대학 재학생도 체감하고 있다. 재학생 A(과학기술대2)씨는 “확실히 옛날보단 외국어 간판이 늘어난 것을 체감한다”며 “그것은 해당 국가의 특성을 드러내지만, 무분별한 사용은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외국어 간판은 일종의 ‘언어 폭력’이다. 김 교수는 “영어를 잘하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모든 국민은 영어 약자인데, 외국어만을 표기한 간판은 약자에 대한 언어 폭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외국어 간판 사용률 낮추려면
외국어 간판의 사용률이 높아짐에 따라 정부, 시에서도 조치에 나섰다. 지난해 6월 한국문화융합학회가 발표한 「국어 문화 정책적 관점에서의 언어 경관 실태 연구」에 따르면, 제주 서귀포시는 공공시설 1650곳의 외국어 표기 및 번역 실태를 조사하고 간판을 정비한 바 있다.
경복궁역 인근에 있는 ‘한글가온길’ 역시 2012년 당시 경복궁과 청와대를 찾는 관광객들의 거점 지역을 단장하기 위해 추진했던 사업이다. 이 사업을 통해 경복궁 인접 지역의 80% 이상의 간판이 한글로 구성됐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위치한 세계 커피 전문 가맹점 ‘스타벅스’는 영어 간판 대신 한글 간판을 사용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노인층 유동 인구가 많은 서울 종로구는 2008년부터 표시 면적의 50% 이상 한글 병행을 원칙으로 하는 간판개선 사업을 진행해 왔다.
세종시는 전국 광역지자체 최초 한글 진흥 전담 부서인 `한글사랑위원회'를 신설했다. 해당 부서는 시민과 전문가들이 함께 한글 진흥 정책 및 사업을 자문하고 심의하는 기구로, 공공언어 개선에 필요한 순화어 발굴에 힘썼다. 이렇듯 공공기관과 지자체에서도 올바른 우리말 사용에 노력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은 ‘쉬운 우리말 쓰기 사업’ 중 하나로 낯선 외국어를 쉬운 우리말로 다듬고 있다. 올해 상반기에는 두 기관이 함께 ‘밸류업’→ ‘가치 향상’, ‘온 디바이스 에이아이’→ ‘단말형 인공지능’ 등 외국 용어 23개를 이해하기 쉬운 우리말로 다듬었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한글
길가를 뒤덮은 외국어뿐만 아니라 무분별한 외래어·신조어 사용도 우리의 일상에 스며들어 있다. 외래어는 다른 언어로부터 들어와 우리말로 동화돼 쓰이는 어휘이다. 2021년 `스마트학생복'이 중고생 114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줄임말·신조어 사용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0% 이상이 줄임말·신조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 이유는 ▶‘짧게 말하고 쓰는 게 편해서’ 51.9%(539명) ▶‘친구들이 대부분 사용해서’ 24.5%(280명) ▶‘재미있어서’ 13.3%(152명) ▶‘유행을 따라야 해서’ 8%(92명)였다. 설문조사에서 알 수 있듯,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외래어·신조어 사용은 증가하는 추세다.
무분별한 외래어 사용은 우리말을 통해 세계를 해석하고자 하는 관념을퇴색시키고, 중장년층 세대와의 의사소통을 어렵게 한다. 김 교수는 “외국어를 섞어 쓰는 것은 소통과 배려, 지식과 정보의 나눔에서 벗어나기에 심각하다”고 말했다. 젊은 세대와 중장년층의 의사소통 문제에 대해 이건식(국어국문) 교수는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간의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또 젊은 세대는 신조어가 우리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 방안인지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훈민정음 창제 전, 우리 민족은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로 표기했다. 세종대왕은 남의 나라 글자인 한문을 빌려 쓰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고, 백성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우리 문자를 만들었다. 이렇듯 한글은 우리나라의 자주성과 주체성을 보여준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외래어 사용에 익숙해졌고, 길거리를 뒤덮은 외국어 간판·메뉴판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단순히 “보기에 고급스럽다”, “더 예쁘다”라는 이유만으로 외국어가 사용된다면 오랜 시간 지켜온 한글의 정체성은 훼손돼 갈 것이다.
Epilogue
1926년 11월, 당시 민족주의 국어학자들의 단체인 ‘조선어연구회’가 주동이 돼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그리고 이날을 제1회 ‘가갸날’, 즉 한글날로 정했다. 한글날을 맞아 우리에게 익숙해진 외래어와 잠시 멀어지고, 소중한 우리의 한글과 다시 가까워져 보는 것은 어떨까.
최정원·김준원·김승건 기자 dkdds@dankook.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