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북디자인의 미학, ‘덜어냄’으로 독자의 눈을 사로잡다
K-북디자인의 미학, ‘덜어냄’으로 독자의 눈을 사로잡다
  • 강민 기자
  • 승인 2026.05.06 10:20
  • 호수 15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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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 전공하고 북 디자인계 몰입
“11년 직장 생활하다 스튜디오 ‘모스’ 운영”

실험적 ‘블루 컬렉션’의 저력 증명
“프랑스 문학 책으로 인테리어 소품까지”

온·오프 모두 주목 끄는 북 디자인
“인공지능은 이길 수 없는 덜어냄의 미학”

 

 

책부터 그래픽·제품·공간까지 자신만의 언어로 확장하며 정제된 표현과 감각적인 시선으로 모스(MOHS) 브랜드를 확장해 가는 디자이너 석윤이.
책부터 그래픽·제품·공간까지 자신만의 언어로 확장하며 정제된 표현과 감각적인 시선으로 모스(MOHS) 브랜드를 확장해 가는 디자이너 석윤이.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가슴 속에 사직서 한 장쯤 품고 산다지만, 이 캐릭터만큼 그 마음을 절묘하게 대변하는 이가 또 있을까. 지난 3월 출판계 화제작으로 떠오른 ‘일의 빡침과 기쁨’의 주인공 ‘물렁이 사원’ 이야기다. 제목부터 도발적인 이 만화 에세이는 출간과 동시에 수많은 K-직장인의 눈물과 웃음을 자극했다. 이 책의 얼굴을 빚어낸 이는 한국 북 디자인계의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는 석윤이(44) 모스(MOHS) 대표다.


북디자이너는 작가가 쏟아낸 텍스트의 숲에서 길을 찾아 시각적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가다. 표지의 강렬한 인상부터 내지 폰트, 여백 너비, 종이 질감, 무게까지 설계해 독자가 책을 쥐었을 때 느끼는 물성적 경험을 기획한다. 디지털이 활자를 삼키는 시대에 종이책이 꾸준히 독자 곁에 남아 소장 욕구를 자극하는 이유는 북디자인의 힘에 있다.


석윤이는 2000년대 후반부터 ‘열린책들’의 디자인을 책임지며 한국 출판 디자인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움베르토 에코 등 거장들의 한국어판 책 얼굴이 그에게서 탄생했다. 현재 디자인 스튜디오 모스를 운영하며 애플·유한킴벌리 등 글로벌 기업과 협업하는 브랜드 디자이너로 영역을 넓히고 있는 그를 서울 모스그래픽 작업실에서 만났다.

 

작업할 때의 기준이 있나요.
“북디자인을 한다고 했을 때, 요즘은 독자가 온라인 썸네일로 책을 먼저 만나요. 모바일 화면에서 손톱만 한 크기로 보일 때 선택받으려면 디자인이 아주 단순하거나, 아주 강렬해야 하죠. 오프라인 서점에서는 물성이 중요해요. 만졌을 때의 질감, 종이의 두께, 후가공의 반짝임이 독자의 마음을 흔들죠. 그래서 온라인용과 오프라인용 디자인의 접점을 찾는 게 가장 어렵습니다.”

 

‘블루 컬렉션’은 북디자인의 전환점이었죠.
“회사에서 수차례 북디자인을 맡았고, 그중에서도 프랑스 현대 문학 시리즈를 담아낸 컬렉션이 회자됐죠. ‘프랑스 대통령의 모자’, ‘오후 네시’, ‘두 해 여름’ 등 8권을 하나의 통일된 톤으로 선보인 책이었습니다. 제목의 위치를 제각각으로 배치하거나 로고를 없애고 그래픽만 강조하는 실험적인 시도였어요. 회사에서도 ‘안 팔릴 것 같다’고 우려가 컸죠. 저는 책 자체가 하나의 인테리어 소품이 되고, 편집숍에 꽂아두고 싶은 오브제가 되길 원했어요. 그 디자인이 지금까지 사랑받았네요. 제게는 ‘이렇게 해도 되는구나’라는 용기를 준 작업이었습니다.”

 

열린책들에서 작업한 프랑스 현대문학 시리즈 ‘블루 컬렉션’은 프랑스 문학의 분위기를 청명한 블루와 그래픽으로 담아낸 대표적인 북디자인 작업이다.
열린책들에서 작업한 프랑스 현대문학 시리즈 ‘블루 컬렉션’은 프랑스 문학의 분위기를 청명한 블루와 그래픽으로 담아낸 대표적인 북디자인 작업이다.

디자인 회사를 선택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저는 서양화과를 전공했어요. 어느 날 서점에서 ‘열린책들’ 서가에 꽂힌 책들을 봤어요. 너무 예쁜 거예요.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에 집에서 명함도 파보고 그림도 그려봤지만 역부족이었죠. 이후 컴퓨터 아트스쿨 학원에 등록해 포토샵·일러스트·쿽(QuarkXPress)을 배웠어요. 그렇게 만든 포트폴리오를 들고 열린책들에 지원했는데 합격이 된 거죠.”

 

디자인 전공자가 아니었는데도요.
“서양화 전공이 무기가 됐어요. 대학 때 판화, 사진, 개념 미술, 설치 미술까지 폭넓게 배운 덕에 생각의 틀에 갇혀 있지 않았거든요. 감각은 쌓여 있었고 기술만 익히면 됐죠. 아마추어 같으면서도 신선한 제 포트폴리오를 회사가 좋게 봐준 것 같아요.”

 

열린책들·미메시스에서의 에피소드가 있나요.
“3년 차 때 대표님 첫 저서를 맡았는데 인쇄 필름 검판 과정에서 사진에 구멍이 생기는 오류가 생겼어요. 아무도 몰랐고 결국 책이 잘못 찍혀 나왔죠. 대형 사고였어요. 하루를 묵히고 나서야 보고하러 갔는데 대표님이 ‘다시 찍어’라고 쿨하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 은혜를 갚으려고 다음부터 더 열심히 일했죠. 인쇄물은 한 번 찍으면 끝이라 마감 때마다 그때의 긴장감이 생각나요.”


11년간의 열린책들 생활을 뒤로하고 그는 35세가 되던 해 자체 회사 모스를 세웠다. 모스는 석 대표를 포함해 기획과 디자인을 넘나드는 소수 정예의 크리에이티브 인력으로 구성돼 있다. 회사 이름은 ‘보여주다(SHOW)’라는 단어를 거꾸로 뒤집어(MOHS) 변형한 것이다.

 

회사 이름이 흥미롭습니다.
“기존의 시선을 뒤집어서 새로운 것을 보여주겠다는 의지예요. 독립하고 나니 인하우스 디자이너 때와는 완전히 다른 뇌를 써야 하더군요. 이전엔 편집자와만 소통했다면 이제는 제작 업체·클라이언트·마케터들과 끊임없이 부딪혀요. 애플 여의도점의 로고 작업이나 크리넥스 패키지 디자인 같은 브랜드 작업은 책과는 또 다른 에너지가 필요하죠.”

 

리빙 영역이나 브랜드 제품 디자인은 어떤 점에서 다른가요.
“북디자인은 내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책의 저자가 있고, 그분의 텍스트에 디자인을 입혀주는 ‘메신저’ 역할을 했으니까요. 디자이너의 영역이 제한적이죠. 브랜드 제품은 독자가 아니라 사용자가 실제로 소장하고 사용하는 물건이에요. 텍스트가 없죠. 그래서 더 신중하고 고민이 많아요. ‘이게 정말 맞는 건가’ 하는 갈등이 끝까지 따라다닙니다. 그만큼 자유롭기도 해요. 컨펌자가 따로 없으니 제 감각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재밌는 영역입니다.”

 

제품을 만들 때 중점적으로 보는 부분은요.
“창작물을 만들되, 쓰임새가 있는 걸 만드는 거죠. 사람들이 가성비를 따지거나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하나의 작품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물건을 만들고 싶어요. 종이라는 한계를 넘어 컵·수건·코스터·가방 등 재질과 변수가 다양해지는 만큼 총체적인 감각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책은 목적이 확실하지만, 제품은 사용자의 일상 속에서 어떻게 녹아들지가 관건이거든요.”

 

공간 작업도 진행하셨는데요.
“지난 3월 완공된 춘천 호반 사거리 육교 바닥에 그래픽을 입히는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춘천이라고 해서 닭갈비나 소양강 처녀 같은 직접적인 이미지를 넣고 싶진 않았죠. 그때 가장 추상적이면서도 컬러감이 돋보이는 패턴을 제안했는데 시에서 흔쾌히 받아주셨어요. 공간에 디자인이 입혀질 때의 그 쾌감은 책과는 또 다른 차원이더군요.”

 

2024년 강원도 춘천 호반사거리 원형 육교에 적용된 그래픽 디자인은 도시의 랜드
2024년 강원도 춘천 호반사거리 원형 육교에 적용된 그래픽 디자인은 도시의 랜드

인공지능(AI) 시대에 디자이너의 경쟁력은요.
“영상이나 모션 영역은 AI가 많이 대체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픽 디자인은 완전히 대체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AI가 아이디어를 만들어 주거나 흉내 낼 수 있지만 완성도 있게 구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어요. 디자인은 제작까지 이어져야 하는데, 인쇄나 제품으로 구현하는 과정은 사람이 해야 하는 영역입니다. 다만 AI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기에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도구라고 봅니다.”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요.
“디자인은 예쁘게 만드는 게 아니에요. 북디자인 경우에는 텍스트를 빨리 파악하고 책의 핵심을 시각화하는 능력이 우선이죠. 지금도 원고 샘플을 받으면 목차부터 훑으며 속독해요. 그 안에서 한 가지를 뽑아내 덜어내는 연습을 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화려함보다는 덜어내는 것이 때로는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거든요.”

 

석윤이의 첫사랑은 회화였지만 그 사랑은 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더 깊고 단단해졌다. 인터뷰 내내 석 대표는 소통과 감각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작가는 텍스트로 말하고, 저는 그 텍스트를 가장 매력적인 얼굴로 세상에 내놓는 통역사이고 싶어요. 북디자인은 독자와 작가를 잇는 따뜻한 대화여야 하니까요.”

 

서울 강서구에 위치한 모스(MOHS) 그래픽 스튜디오에서 석윤이 디자이너가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다.석 디자이너는 정제된 표현과 감각적인 시선으로 자신만의 디자인 세계를 구축해가고 있다.
서울 강서구에 위치한 모스(MOHS) 그래픽 스튜디오에서 석윤이 디자이너가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다.석 디자이너는 정제된 표현과 감각적인 시선으로 자신만의 디자인 세계를 구축해가고 있다.

올해 출판된 ‘명료함’·‘김치 책’·‘일의 빡침과 기쁨’ 책부터 브랜드와 공간으로 지평을 넓힌 석윤이의 작업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항상 처음의 이상을 잃지 않고 가는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모스(MOHS)의 이름이 담은 뒤집힌 시선은 오늘도 새로운 얼굴을 세상에 내놓고 있다.

 

 

강민 기자 min05@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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