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방을 넘어 창조로, 돈가스의 미학
모방을 넘어 창조로, 돈가스의 미학
  • 이주현 칼럼니스트
  • 승인 2026.05.06 10:40
  • 호수 15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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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돈가스

 

추억을 자극하는 소스의 눅눅함과 고기 본연의 맛을 탐구하는 바삭함 사이 돈가스는 원본에 갇히지 않고 각기 다른 미학적 분화를 이뤄낸다.
추억을 자극하는 소스의 눅눅함과 고기 본연의 맛을 탐구하는 바삭함 사이 돈가스는 원본에 갇히지 않고 각기 다른 미학적 분화를 이뤄낸다.

점심시간, 강의실 문을 나서는 순간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오늘 뭐 먹을까?"라는 질문은 형식적으로 사라지고, 발걸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돈가스 가게로 향한다. 학생들에게 돈가스는 단순한 메뉴가 아니다. 점심 메뉴의 선택지를 하나로 수렴시켜버리는 힘을 가진다. 우리가 돈가스 앞에서 유독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데는 실용성 이상의 복잡한 이유가 있다.


사실 돈가스는 존재 자체로 기묘한 혼종이다. 문화이론가 호미 바바는 서로 다른 문화가 섞이는 경계의 공간을 '제3의 공간'이라 불렀다. 돈가스는 이 개념을 접시 위에서 가장 맛있게 구현한 음식이다. 서구의 커틀릿이 일본의 기술을 거쳐 한국 식탁에 오르기까지, 이 음식은 단 한 번도 어느 한 모습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19세기 말 일본에서 태어난 '포크 커틀릿(Pork Cutlet)'은 한국에서 경양식이라는 이름 아래 또 한 번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현지의 입맛에 맞게 끊임없이 스스로를 번역해 온 것이다. 혼종성은 열등한 모방이 아니라 새로운 문화를 생성하는 창조적 과정이며, 돈가스는 그 사실을 가장 직관적으로 증명한다.


이 혼종의 역사는 식탁 위에서 두 갈래로 나뉜다. 한국의 경양식 돈가스는 넉넉함의 미학이다. 얇게 편 고기 위에 브라운 소스를 듬뿍 끼얹고, 케첩 뿌린 양배추를 곁들이는 맛. 소스에 푹 젖은 튀김옷이 주는 달콤한 눅눅함은 어린 시절의 외식 기억과 맞닿아 있다. 반면 일식 카츠는 개별성의 미학이다. 육즙을 머금은 두툼한 고기, 바삭한 빵가루, 고추냉이나 소금 한 점에 의지해 고기 본연의 맛을 탐구하는 과정은 꽤 세련된 경험이다. 흥미로운 건 두 메뉴가 같은 뿌리에서 출발했음에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분화됐다는 점이다. 추억을 자극하는 눅눅함과 감각을 깨우는 바삭함. 하나의 번역이 또 다른 번역을 낳은 셈이다. 한 번 번역된 음식은 결코 원본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새로운 기준이 될 뿐이다.


돈가스가 수 세기를 거쳐 우리 식탁의 주인공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형식적인 틀에 갇히지 않고 스스로를 바꿔온 유연함 덕분이다. 오늘 당신의 식판 앞에 놓인 돈가스는 치열하고 유쾌한 생존의 역사를 담고 있다. 바삭하게, 그러나 자기 방식대로.

 


이주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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