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흔이 말해준 국가폭력 현장
타일 한 장까지 치열한 고증
전일빌딩245 옥상정원에서 바라본 옛 전남도청의 모습. 민주광장과 분수대 너머로 복원된 도청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내부 공간은 당시 항쟁의 흐름을 생생하게 재현한 전시실과 상설 추모 공간으로 꾸려졌다.
Prologue
“설명을 듣는 내내 귀에 아무 소리도 들어오지 않더라고요. 가슴이 꽉 막혀서…눈물만 쏟아졌습니다.”
최영자(61) 5·18 유가족 유공자회 부회장은 떨리는 손을 꾹 쥐었다. 한동안 밖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가 간신히 말을 이었다. “세월이 참 많이도 흘렀네요. 그래도 46년 만에 가림막을 걷어낸 이 진짜 도청을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우리 아이들에게 ‘그날 여기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해줄 수 있어서… 참 고맙고 눈물겨운 봄입니다.”
5월의 광주를 따라가다
오월의 광주가 다시 46번째 봄을 맞았다. 1980년 5월, 시민군이 마지막 순간까지 민주주의를 외치며 목숨으로 사수했던 최후의 보루, ‘옛 전남도청’이 길고 긴 복원의 터널을 지나 마침내 시민들의 품으로 온전히 돌아왔다.
상처는 깊었다. 2015년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도청 본관 별관 일부가 철거되는 등 역사의 원형이 훼손됐다. 이에 반발한 5·18 단체와 유족들, 특히 자식을 먼저 보낸 오월어머니회 회원들은 2016년 9월부터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천막 농성을 시작했다.
범시도민대책위원회의 천막 농성 10년은 가슴 벅찬 기적을 일궈냈다. 1980년 5월 17일부터 26일까지 사방에서 빗발치는 총탄을 온몸으로 막아서며 “비상계엄 해제하라”, “민주주의 쟁취하자”고 외쳤던 광주의 그 열흘간의 시간 속으로 기자의 발걸음을 옮겼다.
닫혔던 문이 열리고 그날의 도청이 전시관으로
도청 본관 앞에 서자 당시 시민군이 사용했던 짙은 초록색 군용 지프차 세 대가 거친 숨을 고르듯 멈춰 서 있다. 1930년 한국인 건축가 김순하가 설계한 옛 전남도청은 독특한 코린트식 기둥의 아름다움 뒤로 역사의 아픈 비극을 품고 있는 건물이다.
묵직한 나무 문을 열고 본관 3층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서늘하고 고요한 공기가 온몸을 감싼다. 층별로 이어지는 항쟁의 기록을 따라 걷다 보면, 바닥 곳곳에 나직이 내려앉은 이름표들이 발길을 붙잡는다. ‘김ㅇㅇ, 당시 19세, 이곳에서 숨짐.’ 시민군의 시신이 발견됐던 바로 그 자리에 쓰인 이름과 나이들. 금방이라도 쓰러진 이들의 온기가 바닥에서 배어 나올 것만 같다.
도청 옆 회의실 건물로 발걸음을 옮긴다. 어두컴컴한 지하 1층에는 그날 밤 시민군이 마지막 총알을 채워 넣었을 무기고가 무거운 침묵 속에 보존돼 있다. 1층에는 역사의 기록을 보관하는 아늑한 종합도서관이 자리하고 있다. 2층으로 올라가니 46년 전 시민군들이 밥을 나눠 먹고 잠깐의 쉼을 청했던 식당과 휴식 공간이 당시의 집기 그대로 재현돼 있다.
발길은 자연스레 시신들이 임시로 안치됐던 옆 건물 ‘상무관’으로 이어진다. 관 바닥에 흐르던 붉은 피와 울음소리는 이제 사라졌지만, 어두운 실내를 채운 추모 영상이 그날의 비통함을 증언하고 있다.
상무관 앞에서 만난 정형철(66)씨는 내부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구원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출근하고, 커피를 마시고, 웃고 떠드는 이 당연한 일상 전부가 사실은 저 누워 있는 분들의 목숨에 빚진 셈이지요. 2024년 말에 있었던 비상계엄 사태를 겪으며 참 피눈물이 났습니다. 민주주의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우리 후손들에게 끊임없이 가르쳐야 합니다.”
친구들과 함께 금남로를 찾은 대학생 이수민(21)씨도 상무관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어릴 때는 그냥 소풍 오듯 무심히 지나치던 공간이었는데, 대학생이 되고 사회를 고민하며 다시 와 보니 도청 건물 하나하나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져요. 왠지 모르게 마음이 시리고 묵직한 울림이 남습니다.”
박태훈 옛전남도청복원추진단 주임은 도청의 하얀 벽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고증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단순히 외형만 흉내 내는 복원이 아니었습니다. 1980년 당시 그들이 겪었던 마지막 순간의 치열함과 가치를 그대로 재현하는 게 핵심이었죠. 자재도 이미 단종된 지 오래고 사진이나 영상 자료도 턱없이 부족해서 타일 한 장, 페인트 색감 하나 맞추는 것조차 매 순간이 험난한 고증의 연속이었습니다.”
5시 18분, 광장에 울린 반주뿐인 슬픈 종소리
도청 문을 나와 광장 한가운데 서면 커다란 분수대가 눈에 들어온다. 46년 전 뜨거운 봄볕 아래 시민들이 ‘민족·민주화 성회’를 열었던 광장의 심장이다. 분수대 너머로 해묵은 시계탑이 보인다. 신군부가 5·18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다른 곳으로 강제 이전시켰다가, 시민들의 손으로 34년 만에 제자리로 돌려놓은 승리의 상징이다.
째깍이는 초침을 바라보며 기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침내 시곗바늘이 오후 5시 18분을 가리킨다.
‘뎅— 뎅— 뎅—’
세 번의 맑고 슬픈 종소리가 광장의 소음을 가르며 울려 퍼진다. 이윽고 가사도 없고 반주만 흐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시계탑 스피커에서 나직이 흘러나온다. 쓸쓸한 반주뿐이지만 광장에 선 이들의 마음속에는 이미 웅장한 떼창이 겹쳐 흐른다.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광장을 등지고 큰길을 건너면, 회색빛 콘크리트 외벽에 수많은 구멍이 뚫린 ‘전일빌딩245’가 고개를 조아리듯 서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벽면을 마주하자 숨이 턱 막힌다. 기둥에, 바닥에 움푹 파인 채 보존된 탄흔들 위에 1번부터 245번까지 붉은 숫자가 선명하게 딱지처럼 붙어 있다.
위성삼(72) 전일빌딩 문화해설사가 탄흔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리모델링 하려고 안전진단을 하다가 이 수백 개의 구멍을 발견했어요.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조사 결과, 하늘을 날던 헬기에서 사격한 탄흔으로 판명 났습니다. 군홧발에 짓밟힌 채 사방이 고립돼 울부짖던 광주를 향해 하늘에서도 총알을 퍼부었다는 명백한 증거죠. 이 건물은 온몸에 상처를 입어가면서도 46년 동안 침묵으로 그 진실을 지켜온 겁니다.”
Epilogue
도청 시계탑의 바늘은 오늘도 어김없이 바쁘게 움직인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교과서 속 격언은 가림막을 걷어낸 옛 도청의 복도에서, 매일 오후 5시 18분 울려 퍼지는 시계탑의 종소리에서, 전일빌딩 벽면에 박힌 탄흔의 거친 감촉에서 살아 숨 쉬는 현실이 된다. 계절이 흘러 5월이 지나면 광주의 붉은 철쭉과 꽃잎은 지겠지만, 그 꽃잎들이 거름이 돼 피워낸 민주주의의 가치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오늘, 어떤 오월을 살고 있습니까.”
글·사진=강영인·김민수·이원용 기자 dkdds@dankook.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