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어렸을 때도 익산 고구마가 참 유명했어요. 예전엔 화물열차에 가득 싣고 용산역까지 보냈지.” 익산 주민 A씨는 옛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한때 화물열차에 실려 전국으로 향했던 익산 고구마는 오늘날 대형 프랜차이즈의 햄버거가 돼 다시 사람들을 만났다. A씨는 “젊은이들도 햄버거로 만들어 주니 좋아해요. 기업과 지역이 머리를 잘 썼네요.”라며 미소를 지었다. 세월을 넘어 지역의 오랜 자부심과 현대 기업의 기획력이 만나 만들어낸 새로움. 이것이 바로 ‘로코노미’의 오늘이다.
지역과 소비자를 잇는 로코노미 바람
로코노미란 지역을 뜻하는 ‘로컬’과 경제를 의미하는 ‘이코노미’의 합성어로, 지역 고유의 식재료·문화·이야기를 활용한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현상을 뜻한다. 과거 지방 특산물이 지역을 찾은 방문객을 위한 기념품이나 명절 선물에 머물렀다면 오늘날의 로코노미는 기업의 기획력과 현대적인 마케팅을 만나 전국 소비자의 일상 소비재로 재탄생하고 있다.
로코노미 열풍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맥도날드의 로컬 소싱 프로젝트 ‘한국의 맛’ 시리즈다. 특히 작년 여름 한정 판매된 ‘익산 고구마 모짜렐라 버거’가 큰 인기를 끌었다. 전라북도 익산 고구마를 넣은 이 버거는 출시 한 달 만에 약 240만 개가 팔려나갔다. 로코노미가 만들어낸 숫자였다. 로코노미는 단순히 특정 특산물을 재료로 쓰는 데서 나아가 지역만의 브랜드 가치까지 함께 판매한다는 점에서 과거 원자재 수급 방식과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지역 특산물에 생산지의 이름과 이야기를 입혀 하나의 브랜드 상품으로 만들어내는 로코노미는,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위기를 맞은 지방 농가와 지역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상생 모델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밭에서 전국으로, 익산 고구마의 상생 현장
로코노미의 재료가 된 익산 고구마는 어떤 현장에서 자랄까. 기자는 전라북도 익산시 고구마 농가 ‘은기농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햇볕이 본격적으로 내리쬐기 전 오전 6시, 은기농장에서는 고구마 수확이 시작된다. 먼저 트랙터가 밭을 가로지르며 무성하게 자란 고구마 순을 걷어낸다. 뒤이어 작업자들이 하나둘 밭으로 들어가 낫으로 남은 순을 정리하고, 덮어놨던 검은 비닐을 벗겨낸다. 비닐 아래 흙이 모습을 드러내면 트랙터가 다시 밭을 가로지르며 땅속에 묻힌 고구마를 솎아 낸다. 작업자들은밭에 앉아 고구마의 흙을 털어내며 상처·크기·모양을 확인해 상자에 차곡차곡 담는다. 가득 찬 상자는 운반차로 창고에 옮겨진 뒤 세척과 출하 절차를 거친다. 이른 아침 시작된 고구마 수확 작업은 오후 5시가 돼서야 끝난다.
이 밭에서 수확된 고구마는 작년 여름, 햄버거의 재료가 돼 전국 맥도날드 매장으로 향했다. 은기농장 서정중(70) 농장주는 “납품 이후 타지 사람들이 ‘익산’ 하면 고구마를 떠올리게 됐다”며 인지도 변화를 체감했다고 전했다. 실제로 서울 농수산물 최대 도매시장 중 하나인 가락동 시장을 비롯해 주요 판로에서 고구마 거래량이 20~30%가량 늘었고, 수도권 택배 주문도 증가했다.
익산시청 농산유통과 김난희(44) 탑마루계장은 “200톤 이상의 익산 고구마가 한꺼번에 소비되면서 농가의 대규모 출하와 재고 해소에 실질적인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익산 고구마’ 브랜드가 전국에 노출돼 인지도와 품질 신뢰도가 올랐다”고 덧붙였다.
효과는 농산물 판매에 그치지 않았다. 김 계장에 따르면 버거 출시 이후 로컬푸드 직매장의 고구마 소비가 늘었고, 지역 방문자 수 역시 작년 대비 최대 20.3%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농산물 소비가 지역 방문과 관광 활성화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나타난 것이다.
맥도날드 익산 고구마 모짜렐라 버거를 직접 먹어본 익산 시민 민경오(22)씨는 로코노미 상품과 관련해 “출시 당시 인스타그램 등 SNS에서 화제가 많이 됐다”며 “농산물을 대량으로 구매함으로써 지역 농가에 도움이 될 것”이라 말했다.
확산하는 로코노미와 남겨진 과제
이러한 로코노미 열풍은 특정 지역과 기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영암군은 백억커피에 멜론 2톤을 공급하며 ‘영암 멜론 주스’로 성과를 거뒀고, 컴포즈커피는 ‘부여 밤라떼’에 이어 ‘논산에서 온 수박주스’를 선보이며 지역 농산물 활용 메뉴를 꾸준히 출시했다. 이처럼 기업과의 연계가 실질적인 결실로 이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지자체의 적극적인 행정 지원과 판로 개척 노력이 있었다. 논산시청 농산물유통지원센터 오두연(43) 유통전문관은 “논산은 단순 생과 판매에 그치지 않고 디저트와 가공식품 분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며 “신세계푸드, 롯데GRS 등 대형 유통사와 협업해 신제품 개발에 속도를 내는 중”이라고 밝혔다. 기업은 기획력을, 지자체는 맞춤형 행정을 펼치며 함께 성장하는 흐름이다. 로코노미는 농가 밖으로도 번지고 있다. 지난 5월 신세계백화점 대구점과 강남점은 팝업스토어를 열어 강진 표고버섯, 해남 김 등 지역 특산물을 활용한 청년 창업가들의 상품을 선보였다.
한편 작년 4월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로코노미 활용 식품 조사’에 따르면, 로코노미 상품을 구매한 경험이 있는 응답자의 81.4%가 로코노미 현상이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소비자들이 제품의 맛이나 가격을 넘어 지역 농가와의 상생이라는 기업의 가치에 의미를 부여하고, 소비를 통해 지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여기에 제철 신선 식재료를 선호하는 ‘제철 코어’도 로코노미 확산에 힘을 보태고 있다.
그러나 로코노미가 지역경제 전반에 뿌리내리기까지는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로코노미 상품은 고구마·밤·수박처럼 제철 음식을 주로 사용하기에 판매 기간이 한 달 정도로 짧다. 이처럼 대부분이 단기 한정 판매에 그치고 있어 실질적인 농가 소득 창출로 이어지는 데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회성 협업을 넘어설 장기적 연계 방안
삼성카드 데이터랩에 따르면 로컬 마트의 가맹점 비율이 1.4%에 불과한 상황에서 지역 농가와 전문가들은 일회성 이벤트를 넘어선 ‘지속성’을 핵심 조건으로 꼽는다. 농림축산식품부에서 발표한 2023 국내외 외식 트렌드 보고서에 소개된 대만 사례처럼 지자체 차원의 로컬 프로모션이나 농가와의 연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서 농장주 역시 한 달 남짓의 단기 판매가 아니라 최소 6개월은 판매가 이어지고, 기업·지자체의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도 지속적인 상생과 협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서용구(경영) 숙명여대 교수는 “단순 마케팅을 넘어 약 10년의 장기 계약을 통해 꾸준히 함께 가는 동반자적 자세와 배려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종우(유통마케팅) 남서울대 교수 역시 “단발성 협업에 그치지 않고 팝업스토어나 지역 축제 연계 등 경험 마케팅을 지속해 농가와 지역이 함께 활동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결국 로코노미의 성패는 기업·지자체·농가가 일시적 마케팅 효과에 기대지 않고 이들이 안정적인 거래 구조와 상생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
Epilogue
밭에서 자란 농산물은 기업의 상품이 되고, 소비자의 식탁을 거쳐 다시 지역의 이름으로 돌아온다. 로코노미가 만드는 변화다. 농가는 판로를 얻고, 지역은 전국에 이름을 알리며, 기업은 새로운 소비 경험을 만든다. 하지만 지역 특산물을 전국에 알리고 판로를 넓힌 것만으로 이를‘상생’이라 부르기는 어렵다. 짧은 판매가 끝난 뒤에도 농가와 지역에 무엇이 남는지, 그 효과를 어떻게 이어가는지는 여전히 지켜볼 일이다.
조운서·강영인·이정연·김창호 기자 dkdds@dankook.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