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망국의 역사를 떠올리며
⑤ 망국의 역사를 떠올리며
  • 김재관(동양학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11.04.12 14:38
  • 호수 129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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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의 피난길을 따라가며

 

⑤ 망국의 역사를 떠올리며

  이광수는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아침 일찍 ‘이인’을 떠난다. 산골짜기 사이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가면서 새삼 신작로의 풍광에 감탄한다. 이미 ‘조치원’에서 ‘공주’로 가는 신작로에서 느꼈던 그 기분은 아카시아 나무가 나란히 심어진 이 길에서 다시 나타난다. 그런데 이전에 느꼈던 상쾌함과는 달리 ‘운치(韻致) 있다’고 표현하는 것을 보니 심사가 복잡했나 보다. 동행도 없이 걷는 길에서 듣는 빗소리와 벌레소리가 쓸쓸한 그의 마음을 자극했던지, 이 길을 따라 피난 갔던 의자왕도 자신처럼 이 소리를 들었으리라 상상한다.


  ‘공주’로 몽진했던 의자왕 일행을 상상하는 장면에서 그는 ‘망국(亡國)의 비애’를 떠올린 듯하다. ‘망제(望帝, 중국 촉나라의 왕으로 별령(鱉靈)에게 왕위를 뺏기고 울다 죽어서 두견새가 되었다는 중국 설화 속의 주인공)’의 분신인 ‘두견(杜鵑)새의 울음소리’가 떠올리는 슬픔의 감정은 복잡하다. 빗길을 혼자 걸으며 보고 들었던 것들이 그의 마음을 초연(超然)하게 했을 수도 있고, 이 길에서 떠올린 ‘망국의 역사’가 그의 애를 끓게 했을 수도 있다. ‘두견새의 울음소리’는 의자왕의 원혼(    魂)일 수도 있고,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의 원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차령 남쪽의 땅은 산은 살기를 벗지 못하였다’고 쓰고 있는데, 일제가 건설한 신작로도 산세를 따라 만들어졌다. 예전부터 사람의 왕래가 많았던 길에 만들어졌던 신작로는 여전히 산과 들의 형세를 따라 만들어졌다. ‘이인’에서 신작로를 타고 ‘부여’로 갔던 이광수는 적지 않은 고개를 넘고 또 넘어간다. 왕복 4차선 자동차전용도로가 뻥 뚫린 오늘날도 ‘이인’에서 ‘탄천’까지 이르는 길은 “탄탄(坦坦)한 신작로(新作路)가 협장(狹長)한 산협간(山峽間)으로 달아난 것이 마치 일조(一條) 청류(淸流)와 같다”고 한 이광수의 표현처럼 여전히 깊고 길다.       


  ‘망국의 땅’에 있는 ‘망국의 도시’로 가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의 슬픈 마음은 죽은 자들의 공간에서 공공연하게 드러난다. 가로 누운 주춧돌이나 낡은 비석 등의 역사적 유적은 물론이고 갖은 풍상(風霜)을 겪은 듯한 주모를 보면서도 비애감을 감추지 않는다. 그런데 부여읍 가증리(佳增里, 1917년 당시에는 扶餘郡 縣內面에 속해 있었음)에서 만난 신석기 고분에는 예외적인 시선을 보낸다. “난리(亂離)에 잃어버렸던 선조(先祖)의 분묘(墳墓)를 보는 듯한 기분이라고 표현한 그의 속마음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다만 민족의 시원(始原)을 한반도의 고대사와 연결시키고자 했던 초기 논설의 논조로 추정해 볼 수는 있다. 봉건왕조 조선은 부정하지만, 고대의 찬란했던 역사에는 찬사를 보냈던 그가 아니었던가. 서두르지 않았던 그의 걸음도 여기를 지나면서부터 잰걸음으로 바뀐다. 백제 시기 ‘부여’의 모습(반월성(半月城)’에서는 취군취타(聚軍吹打)가 울려 퍼지고, 사비수상(泗水上)에서 연주되는 관현(管絃)의 태평악(太平樂)이 유랑하게 들리는 모습)이라 상상하지만 고대사의 영광은 재현되지 않는다.


  ‘부여’ 읍내로 들어가기 직전 들떴던 그의 상상은 ‘물고개’를 넘으면서 슬픔의 정조로 되돌아간다. 오늘날 이곳은 왕복 4차로로 확장된 40번 국도가 우회하면서 차량의 통행량이 적은 고개로 바뀌었지만, 예전에는 ‘부여’ 읍내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었다. 그는 ‘부소산(扶蘇山)’과 ‘부여’의 들녘을 바라보며 다시 현실을 깨닫는다. 이곳도 조선의 다른 곳과 다르지 않았다. 초가집 이삼십 여 채가 쓰러질 듯 서있는 모습에서 과거의 영광을 떠올리는 것조차 쉽지 않다.


  ‘부여’를 그리워했던 마음에 들떠 쏟아지는 비를 뚫고 왔건만, 천 삼백 여 년 전 역사의 흔적은 인사(人事)에 마멸되고 없었다. 헌병분대(憲兵分隊) 구내에서 발견한 백제의 석조 유물에서 번성했던 고대 로마를 떠올리는 그의 상상력은 빈곤하기 그지없다. ‘부소산’에 올라 백제의 마지막 날을 떠올려 보지만, 비극의 흔적들은 황량한 기분만을 더할 뿐이다. 주인 잃은 유적에서 ‘백제의 영광’을 상상해 보지만, 치욕의 역사만이 떠오를 뿐이다. 망국의 역사와 함께 사라진 ‘문아(文雅)한 백제인’을 열망하지만, 그들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며 전설로만 남았다. 그가 상상하는 ‘백제의 비극’은 고란사(皐蘭寺)에서 절정에 이른다. 낙화암에서 백마강으로 몸을 던졌던 궁녀들의 전설은 비극으로 끝난 백제의 상징이었다.


  “사자수(백마강) 내린 물에 석양이 빗길 제 / 버들꽃 날리는데 낙화암이란다. // 모르는 아이들은 피리만 불건만 / 맘있는 나그네의 창자를 끊노라 / 낙화암 낙화암 왜 말이 없느냐.” 그는 이곳을 방문한 이후에도 낙화암의 비극이 생각났던지 ‘낙화암’이라는 시를 지어 사라진 백제를 추모했다. 삼천궁녀의 전설이 의자왕의 무능함을 부각시키기 위한 허위지만, 비극의 역사를 이보다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도 없을 것이다. 나당연합군에 쫓긴 백제 나인들의 죽음은 꽃처럼 떨어지며 목숨을 버린 전설로 되었고,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백제를 떠올리는 이야기가 되었다.   


  이광수가 낙화암을 찾았을 때는 이곳의 상징물인 ‘백화정(百花亭)’이 없었다. 그는 고란사에서 낙화암으로 오르면서 백제 최후의 날을 상상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낙화암 정상에 있는 ‘백화정’에 올라 백제의 전설을 떠올린다. 1929년 정자가 세워지면서 낙화암을 전망하는 위치가 바뀌었고, 낙화암의 비극도 반감되었다. 백마강의 수려한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정자에서 비극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장맛비에 황톳물로 변한 백마강 위로 솟은 낙화암을 바라보며 백제의 전설을 떠올린 이광수처럼 비극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이곳은 백마강에서 올려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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