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백제를 잇는 길
④ 백제를 잇는 길
  • 김재관(동양학연구소) 연구교수
  • 승인 2011.04.12 14:42
  • 호수 129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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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티’를 넘어 부여로 간다

④ 백제를 잇는 길

  공주에서 부여를 거쳐 당진까지 이어지는 국도 40호선은 백제를 잇는 길이다. 금강교 북단에서 국도 32호선과 분기된 길은 공주를 대표하는 유적인 무령왕릉을 지나서,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부여’를 연결한다. 이 길은 백제의 중흥과 패망의 역사를 간직한 길이자, 조선 후기 ‘반봉건 · 반외세’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동학농민군의 희망과 좌절의 역사를 담고 있는 길이다.


  성왕은 538년(성왕 16년) 백제의 중흥을 꿈꾸고 이 길을 따라 ‘사비(부여)’로 수도를 옮겼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으로 수도를 ‘공주(웅진)’로 옮길 수밖에 없었던 백제는 무령왕에 와서야 왕권을 회복하게 되었다. 무령왕의 아들 성왕은 드넓은 농토를 배후지로 갖춘 ‘부여’로 천도를 단행했는데, 이로써 백제의 웅진 시대는 끝난다. 122년 뒤 나당연합군에 쫓긴 의자왕은 이 길을 따라 ‘공주’로 몽진했고, 나당연합군에 대항하려 했지만 패망했다. 한강 시대 백제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공주’를 떠났으나, 결국 백제는 ‘공주’에서 최후를 맞게 된 셈이다. 백제의 역사에서 ‘공주’는 오욕과 영광, 다시 오욕의 역사를 담고 있는 곳이다.   


  그렇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공주’에서 백제의 역사는 희미하게 기억될 뿐이었다. 적어도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되기 이전까지 ‘공주’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부여’에 비하여 주목받지 못한 곳이었다. 웅진 시대 마지막 왕이었던 무령왕의 무덤이 우연치 않게 발견되면서 ‘공주’는 백제를 대표하는 도시로 부상하게 되었다. ‘백제 이래의 연고 깊은 도회’ 정도로만 ‘공주’를 인식했던 이광수가 무령왕릉의 존재를 알았다면, ‘공주’는 다른 차원에서 기술되었을 것이다. 그는 무령왕을 몰랐고 웅진 백제에 대한 지식도 부족했다. 그는 ‘공주’에서 조선시대의 유적만을 돌아보고 그곳을 떠난다. 


  그렇지만 오늘날 무령왕을 언급하지 않고서는 웅진 백제를 설명할 수 없고, 웅진 백제를 말하기 위해서는 무령왕릉을 반드시 거론해야 한다. 무령왕릉과 그곳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공주’에서 백제 중흥의 기틀을 마련했던 무령왕의 분신이자, 백제의 대표적인 도시로 ‘공주’를 떠올리게 하는 타임캡슐이다.


  ‘이인’은 비를 맞으며 공주를 떠났던 이광수가 하루를 유숙했던 곳이다. ‘이인’은 조선시대에도 역이 설치되어 있을 정도로 교통의 요지였다. 조선시대 충남과 호남을 잇는 삼남대로가 ‘공주’에서 ‘계룡’을 거쳐 ‘논산’으로 이어졌다고 해서 ‘이인’을 거쳐 가는 이 길의 중요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삼남대로는 말만 대로였지, 대량으로 물건을 나를 수 있는 큰길은 아니었다. 이 길은 삼남대로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대량 수송이 가능한 금강 뱃길과 연계된 길이었다. 조선시대까지 금강의 뱃길은 주요 간선교통로였고, 충청의 내륙은 금강에 있는 나루를 통해 연결되었다. 오늘날도 이 길은 금강에서 벗어나기도 하지만, 다시 금강과 만나 평행선을 이루며 ‘부여’로 이어진다.


  ‘이인’은 호남에서 충청감영이 있던 ‘공주’로 가는 길목에 있어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척왜척양(斥倭斥洋), 제폭구민(除暴救民),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들고 호남에서 봉기했던 동학농민군은 충청감영이 있던 ‘공주’를 향해 진격했지만, ‘이인’에서 ‘공주’로 넘어가는 ‘우금티’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패하면서 몰락하였다. 봉건 조선의 환부를 도려내고 평등 세상을 건설하고자 했던 동학혁명은 실패했지만, 이로 인해 조선의 몰락은 가속화되었다. 이처럼 ‘우금티’는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는 조선의 역사적 행로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소이다. 


  조선을 구하고자 했던 이들이 피를 흘렸던 이 길을 가면서 이광수는 침묵한다. 오늘날 ‘공주’에서 ‘부여’를 잇는 국도 40호선은 천안논산고속도로의 ‘남공주 나들목’으로 지나가지만, 이전에는 우금티를 넘는 길이었다. 일찍이 동학의 서기로 활동했던 전력이 있었고, 동학과 통합한 ‘일진회(一進會)’의 후원으로 1905년 1차 동경유학까지 다녀왔지만, 그는 ‘우금티’의 역사를 기술하지 않는다. 좬매일신보좭의 후원을 받아 여행을 하는 그의 처지에서 반일(反日)의 역사를 기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왜 ‘우금티’를 넘어갔을까? 당시 금강에는 ‘공주’와 ‘부여’를 정기적으로 운항하는 배가 있었음에도 그는 걸어서 ‘부여’로 간다. 일제는 충남 일대의 물산을 나르기 위해 1910년부터 ‘공주’와 ‘군산’을 잇는 ‘제일공주환(第一公州丸)’과 ‘제이공주환(第二公州丸)’을 취항(한 사람당 운임은 1원 50전, 쌀은 석당(石當) 25전을 받았다. 당시의 1원은 현재의 1만원 정도)시켰다. 편안하게 배를 타고 갈 수 있었음에도 굳이 비를 맞으며 걸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좬매일신보좭가 요구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패적비 견학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공주’를 빨리 벗어나려고 했다. 충남 사찰의 총본산인 ‘마곡사(麻谷寺)’를 가보고 싶어 하지만, 불량한 기후를 핑계 삼아 포기한다. 일제의 요구를 거절한 상황에서 ‘마곡사’에 가는 일은 어색했을 것이다.


  아니면 자신이 몸담았던 동학의 전적지를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1917년 상반기 동안 지속되었던 가뭄으로 ‘공주’ 지역 금강의 수량은 많이 줄어 있었다. ‘부여’에서 ‘강경’으로 이동하면서 작은 배를 타고 가는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공주-부여’ 간 뱃길에서도 배는 다녔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서둘러서 ‘공주’를 떠난다. 


  그가 ‘우금티’를 넘어 간 이유는 알 수 없다. 비를 맞으며 ‘이인’에 도착한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누추했던지 ‘보명단(保命丹) 행상 같이 꾀죄하다’고 적는다. ‘이인면 사무소’에 도착해서 면장(面長)에게 도움을 구했지만, 그는 신문기자를 장사치의 하나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면사무소에 배달된 신문(매일신보와 경성일보)을 봤던 흔적도 없이 쌓아 놓을 정도로 면장은 문명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이광수는 ‘이인’에서 다른 곳과 달리 환대를 받지 못한다. 그것은 ‘면장’이 좬매일신보좭의 협조 요청을 받지 못했거나, 아니면 이광수가 애초에 계획된 여정에서 벗어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는 이곳의 상황을 절망적으로 생각했는지, 헌병주재소에서 빌려 준 담요를 덮고 ‘부여’만을 생각한다. ‘이인’은 ‘부여’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대조를 이루며, 빨리 벗어나야 할 곳으로만 치부될 뿐이다.

▲동학농민군의 격전지였던 ‘우금티’ 아래로 터널이 뚫리면서 고개에는 동학혁명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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