敬의 思想家, 退溪 李 滉
敬의 思想家, 退溪 李 滉
  •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 승인 2013.01.08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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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의 思想家, 退溪 李 滉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퇴계(退溪) 이 황(李滉)은 1501년(燕山君 7년) 음력 11월 25일,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온계리(溫溪里), 지금의 안동시(安東市) 도산면(陶山面) 온혜리(溫惠里)에서 7남1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퇴계는 태어난 지 7개월되던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32세의 젊은 홀어머니 밑에서 어린시절을 가난하게 지냈다.

 

    高峯 奇大升과의 8년간의 論辯

 

    일찍이 아버지를 여읜 태계는 여섯 살 때 마을 노인으로부터 천자문(千字文)을 배웠으며, 열두 살 때부터는 안동부사(安東府使)와 강원감사(江原監司)를 지낸 숙부인 송재공(松齋公) 우(堣)로부터 논어(論語)를 비롯한 유학(儒學)을 배웠다.

    퇴계는 일생을 살아가면서 숙부로부터 이 때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朴鍾鴻, ‘性理學의 眞髓 - 李 滉’, 「韓國의 人間像」 4). “내가 게으르지 않았던 것이 모두 숙부 송재공의 가르치고 독려하여 주신 덕택이다.”

 

    퇴계의 삶은 학문 그 자체였다.

    퇴계는 19세 때에 송학(宋學)을 대표하는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접하면서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며, 20세 때에는 「주역」(周易)을 읽고 그 뜻을 알고자 침식을 잊을 정도였다고 한다. 퇴계는 이 때부터 학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어가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퇴계는 50세 때 봄에 관직(官職)에서 물러나 도산(陶山)에 한서암(寒栖庵)을 짓고,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였다. 그리고, 60세 때에는 그에게 학문을 배우려고 모여드는 젊은이들이 나날이 늘어나서 이 곳 한서암이 강학(講學)의 장소로서 너무 좁은 탓에 도산서당(陶山書堂, 뒷날 陶山書院)을 짓고, 이 서당을 중심으로 스스로 학문을 연마하면서 동시에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이 곳에서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개정한 「개정천명도설」(改訂天命圖說)을 비롯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 「계몽전의」(啓蒙傳疑) ‧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 ‧ 「도산기」(陶山記) ‧ 「정암조선생행장」(靜庵趙先生行狀) ‧ 「심무체용변」(心無體用辯) ‧ 「심경후론」(心經後論) ‧ 「성학십도」(聖學十圖) 등의 저술을 계속하였다. 이들 저술을 통해서 퇴계의 학자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데, 이들 중 「성학십도」는 퇴계가 68세 때의 저술로서 그의 철학사상(哲學思想)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은 17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선조(宣祖)임금에게 올림으로써 선조로 하여금 성리학(性理學)을 통한 ‘성군’(聖君)이 되기를 바라는 충정(忠情)을 담고 있는 것으로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또, 퇴계의 문하(門下)에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을 비롯하여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 한강(寒岡) 정 구(鄭逑) ‧ 월천(月川) 조 목(趙穆) ‧ 문봉(文峰) 정유일(鄭惟一) 등의 학자들이 배출되었는데, 이들은 그 뒤에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중심인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리고, 1550년(明宗 5년), 풍기군수(豊基郡守)로 있으면서 주세붕(周世鵬)이 1543년(中宗 38년) 순흥(順興)에 건립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만든 것도 퇴계의 학자로서의 모습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사액서원의 효시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전국 각지에 많은 서원이 세워졌으며, 조선조(朝鮮朝) 유학(儒學)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퇴계가 8년간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 1527~1572)과의 ‘사단칠정논변’(四端七情論辯)일 것이다.

    그 때, 퇴계는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59세의 대유학자이었던 데 비하여, 고봉은 이제 막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관직에 첫 발을 들여놓은 33세의 젊은 선비이었다. 이는 장유유서(長幼有序)의 벽을 뛰어 넘는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사실로서, 퇴계의 선비로서의 참모습을 엿보게 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敬은 儒敎的 삶의 根本

 

    퇴계는 주자(朱子)의 주장에 따라 우주(宇宙)의 현상을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으로 설명하였는데, 이(理)와 기(氣)는 서로 다르지만 상호의존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理)는 우주만물(宇宙萬物)의 존재근거이며, 기(氣)는 이(理)의 법칙에 따라 구체화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理)를 어떻게 현실에 구현할 것인가? 이것이 ‘경(敬)의 철학’이다.

    퇴계의 성리학은 아무리 뜻이 높다고 하더라도 경(敬)의 내공이 부족하면, 그 뜻은 실패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담고 있다. 즉, 경(敬)은 이상(理想)과 현실(現實)의 간극을 메우는 요소이다. 따라서, 경(敬)은 이(理)의 능동성, 즉 이발(理發)과 논리적으로 짝을 이룬다. 말하자면, 경(敬)은 이(理)의 실현을 위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퇴계는 ‘경’(敬)을 삶의 지표로 삼고 일생을 산 ‘경(敬)의 사상가(思想家)’이었다. 그가 숨을 거두기 4일 전에 한 유언을 보면 그의 삶의 모습이 엿보인다. “예장(禮葬)을 사절할 것”과 “비석(碑石)을 세우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묘에 무슨 표지를 하고 싶거든 비석 대신에 다만 ‘작은 돌’(小石)을 사용하여 그 앞면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쓰고, 뒷면에는 ‘향리(鄕里) ‧ 세계(世系) ‧ 지행(志行) ‧ 출처(出處)’를 가례(家禮)의 방식에 따라 간략하게 쓰라고 일렀다고 한다.

    이는 퇴계가 자신의 수양을 가장 중요시하는 성리학의 연구를 일생의 업(業)으로 삼았던 선비의 면모를 엿보게 한다.

 

    그런데, 퇴계의 삶은 사화(士禍)와 무관하지 않다. 갑자사화(甲子士禍) ‧ 기묘사화(己卯士禍) ‧ 을사사화(乙巳士禍)가 그것이다. 특히,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성공한 정국공신(靖國功臣)들과 그들의 삭훈(削勳)을 주장하는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의 개혁과정에서 사림(士林)의 중심인물인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패배의 쓴 잔을 마시게 된 기묘사화(1519년)는 19세의 퇴계에게는 커다란 충격과 교훈으로 다가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 뿐만이 아니다. 퇴계는 1545년 중종(中宗)의 계비(繼妃)를 둘러싼 윤 임(尹任)과 윤원형(尹元衡)의 대윤(大尹) ‧ 소윤(小尹)간의 외척(外戚)다툼에서 발단된 을사사화 때의 유신(儒臣)들의 희생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사화의 피 뿌리는 과정을 지켜본 퇴계는 그의 사상형성에 적지 않는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퇴계의 ‘경(敬) 사상(思想)’은 16세기 조선의 사화의 풍랑을 지켜보면서 터득한 철학에 연원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퇴계는 ‘지행병진’(知行竝進)의 삶을 살아가면서, 학문과 교육을 통해서 통치질서를 점진적으로 변화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퇴계는 이(理)의 구현을 최종 목적으로 하는 자신의 학문을 ‘성학’(聖學)이라 이름하고, “성학은 경(敬)에서 시작하여 경(敬)에서 끝난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dknew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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