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의 잇단 妄言을 지켜보면서
日本의 잇단 妄言을 지켜보면서
  •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 승인 2013.05.31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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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의 잇단 妄言을 지켜보면서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하시모토 도루(橋 下徹) 일본 유신회 공동대표가 또 망언(妄言)을 쏟아냈다. 아베(安倍) 총리에 이은 망언이어서 국제적 비난의 여론은 더욱 높다.

     미국과 독일의 언론들은 “일본 정치인들의 잇단 망언이 동북아(東北亞)의 외교적 ‧ 정치적 갈등을 불러오고 있다”며, 일본이 2차 세계대전으로 한국을 비롯한 만주와 중국을 침략한 과거사(過去事)에 대하여 진정성 있는 사과(謝過)를 촉구했다.

     지난 24일에는 론 김(한국명 김태석) 미국 뉴욕주 하원의원을 비롯한 교민들도 뉴욕 맨해튼 유엔 주재 일본대표부 앞에서 하시모토의 위안부(慰安婦) 망언을 규탄하는 집회를 가졌다(세계일보 2013. 5. 27, 1면).

     韓國人의 아픔을 外面하는 日本

 

     일본은 1905년 강압적으로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을 체결하고, 한국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통감(統監)에 의한 내정간섭(內政干涉)을 노골화하고 한국의 외교권(外交權)을 빼앗아갔다.

     그리고, 1910년 일본에 의한 한일병합(韓日倂合)으로 말미암아 한국은 일제(日帝)의 가혹한 식민통치(植民統治)에 시달리게 되었다.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자 통감부를 폐지하고 총독부(總督府)를 설치하여, 총독(總督)으로 하여금 한국에서의 입법권 ‧ 행정권 ‧ 사법권을 행사하게 하였다.

     이것이 일본에 의한 가혹한 무단정치(武斷政治)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일제는 식민지배의 수단으로서 토지의 수탈과 한국인의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를 획책하였다. 또, 1920년대에 들어와서는 미곡(米穀)의 수탈을 목적으로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을 세웠다. 이에 더하여, 금 ‧ 은 ‧ 철 등의 지하자원을 하나도 남김없이 약탈해갔다. 이로써 이 땅에 남은 것은 그저 발가벗긴 힘없는 식민지의 백성이 있을 뿐이었다.

     일제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이니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우면서 민족말살정책(民族抹殺政策)을 자행하였다. 창씨개명(創氏改名)은 또 무엇이었던가. 창씨개명을 자행하면서 “한국인들의 희망에 따라 행하여졌던 것”이라고 둘러대기도 하였으니, 말문이 막힐 따름이다. 그리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한글로 발행되는 신문을 모조리 폐간함으로써 우리의 눈을 가렸다.

     어디 그 뿐이었던가. 날조된 105인(百五人) 사건, 민족주의자 181명을 검거한 동우회(同友會) 사건,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 때 재일본(在日本) 한국인 대학살(大虐殺) 사건, 수많은 기독교신자(基督敎信者)를 투옥한 기독교 반전공작(反戰工作) 사건, 국학연구(國學硏究)를 탄압하기 위하여 조작한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사건 등은 그들의 마각(馬脚)을 들어낸 대표적인 사건들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1941년 12월 미국 ‧ 영국 등의 연합국에 대하여 전면(全面) 전쟁을 도발하고, 전쟁물자의 생산을 위하여 한국인을 강제로 징용하였으며, 우리의 젊은이들을 전장(戰場)으로 내몰았다. 또, 젊은 아낙네들을 일본군 위안부로 끌고 가지 않았던가.

     獨逸처럼 무릎 꿇고 謝罪해야

 

     꽃다운 나이에 강제로 일본군에 끌러가 젊음을 짓밟힌 우리 할머님들의 찧어진 가슴을 누가 어루만저준단 말인가?

     매주 수요일 12시가 되면 어김없이 일본 대사관 앞 광장에서 위안부 할머님들이 집회를 열고 있다. 날씨가 덥거나 춥거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 집회는 어김없이 열린다. 이제 살아남은 할머님은 50여명에 불과하다. 팔순, 구순의 할머님들 뿐이다.

     집회 마지막에는 “일본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라! 일본정부는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법적인 배상을 하라! 일본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올바른 교육을 철저히 시행하라! 일본정부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와 인권회복을 위해 적극 앞장서라!”를 목청 높혀 외친다. 그러나, 일본 대사관은 창문 을 걸어잠그고, 귀를 막는다.

       작년 6월에는 참으로 해괴한 일이 벌어졌다. 자기를 일본의 민족주의자라고 소개한 스즈키 노부유키(鈴木信行)라는 괴청년이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표기)는 일본 땅’이라는 말뚝을 몰래 가지고 와서 일본 대사관 광장에 세워져 있는 「위안부 소녀상」 옆에 묻고 갔다. 어이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금년에는 3 ‧ 1절을 앞두고 일본 국수주의 단체로 알려진 한 록밴드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매춘부’라고 모독한 노래와 영상을 담은 CD를 경기도 광주시 사회복지법인 ‘나눔의 집’에 보내와 할머님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적이 있었다(조선일보 2013. 3. 4).

     그런데, 최근에는 하시모토 일본 유신회 공동대표가 “국가의 의사로 조직적인 납치, 인신매매를 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증거가 없다”(NAVER 2013. 5. 27)고 생때를 쓰고 있다. 이는 2007년 아베 내각이 “군과 관헌(관청)의 강제연행을 보여주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결의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마쓰모토 마사요시(松本榮好, 91세)의 “나는 전쟁범죄자다”라는 고백(연합뉴스 5. 23)이 아직도 우리 귀에 쟁쟁한데, 일본 정치인이 망언을 늘어놓고 있으니, 참으로 어이가 없다.

      하시모토에게 묻는다. ‘1970년, 독일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총리의 유태인 희생자 위령탑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느냐’고. 그리고, ‘1985년, 독일 대통령 바이츠제커(Richard von Weizsacker)가 종전 40주년을 맞아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만행을 사죄한 사실을 잊었는가’라고 말이다.

     또, 영국은 어떠한가. “영국 정부가 1950년대 자국의 식민지였던 케냐에서의 가혹행위로 피해를 당한 사람들에게 개별적으로 배상키로 하였다”(조선일보 2013. 5. 7). 또, 영국은 “현재 영국의 발전은 수백년 간 노예무역 등 식민통치 덕을 본 측면이 크므로 선대(先代)의 모든 과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문화일보 2013. 5. 7, 「사설」). 역시 대국(大國)다운 행동이다.

       일본 정치인들에게 “사람들은 사과(謝過)를 나약함의 상징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과의 행위는 위대한 힘을 필요로 한다”는 미국의 정신의학자 아론 라자르(Aaron Lazare)가 남긴 명언을 들려주고 싶다. 그리고, ‘사과하는 것이 진정한 용기’라는 것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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