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6 ‧ 25 戰爭’을 되돌아본다
다시 ‘6 ‧ 25 戰爭’을 되돌아본다
  •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 승인 2013.06.28 18: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다시 ‘6 ‧ 25 戰爭’을 되돌아본다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1950년 6월 25일. 이 날은 북괴(北傀)의 불법남침(不法南侵)에 의하여 ‘6 ‧ 25 전쟁’이 발발한지 63년이 되는 날이다. 이로부터 3년1개월 동안 한반도(韓半島)를 포화(砲火) 속에 몰아넣고, 우리 동포(同胞)를 연옥(煉獄)에서 신음하게 하였다.

 

     臨津閣 望拜堂 앞에 서서

 

     나는 지난 17일, 제자 두 사람과 함께 63년 전의 비극(悲劇)을 머리에 그리면서 임진각(臨津閣) 주변을 둘러보는 기회를 가졌다.

     임진각은 군사분계선(軍事分界線) 7km 남쪽에 위치해 있어서 임진강(臨津江)을 사이에 두고 북한(北韓) 땅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곳이다. 임진각 전망대에 올라 망원경으로 바라다 보니 북한주민들의 움직임이 띄엄띄엄 보였다.

 

     임진각은 1972년에 실향민(失鄕民)들을 위해 세워졌는데, 그 주변에는 6 ‧ 25 전쟁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우렁차게 기적을 울리며 남북을 달리던 철마(鐵馬)가 ‘자유(自由)의 다리’ 건너 북쪽을 향해 말없이 서 있는 모습이 6 ‧ 25 전쟁의 비극을 말해주는 듯 했다. 우리 셋은 말없이 서있는 철마를 어루만지면서 하루 빨리 남북통일의 그 날이 오기를 염원했다.

     철마가 서 있는 철길을 건너 자유의 다리를 걸으면서 하루 빨리 7천만 우리 겨레가 이 다리 위를 자유로이 오고 가기를 희망하면서, 문득 1990년 2월 허물어지고 있는 베를린장벽을 목격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의 승리가 아니었던가. 사필귀정(事必歸正)이러니 했는데.

     자유의 다리 옆 광장둘레의 철조망에 매달아 놓은 ‘민족(民族)의 소망’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하루 빨리 분단(分斷)의 아픔을 풀어주소서”, “저희들이 결혼했습니다. 첫 아기를 안고 이곳을 찾을 때는 통일의 꿈이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 ‧ ‧. 이 곳을 다녀간 이들의 소망 하나하나가 빨리 이루어져야 할 텐데. 나도 이들이 써서 메단 ‘소원의 쪽지’ 앞에 서서 나의 통일에의 소망을 간절히 빌었다.

     강토의 허리를 가로지른 휴전선에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이름모를 잡초들이 우리의 소망을 알기나 할까. 오로지 새들만이 자유롭게 남북으로 넘나들고 있었다.

 

     6 ‧ 25 전쟁! 듣기만 해도 몸서리치는 그 날의 악몽을 우리는 한 시도 잊을 수 없었다. 여덟 살 어린 나이에 보리쌀 두어되를 등에 메고 피난행렬 속에 섞여 목적지도 없이 그저 남으로 남으로 향해 걷는 무겁기만 했던 발걸음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부모 잃은 아이들의 울부짖음, 총탄에 상처를 입고 피흘리는 사람들의 신음소리, 굶주림에 배를 움켜쥐고 토악질하는 사람들, 짐보따리를 잃어버린 아낙네의 넋나간 모습, 고난을 이기지 못한 채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 형상. 이 모두가 어린 나를 한없이 슬프게 했었다.

     고통은 이뿐이 아니었다. 열흘도 못가 가져간 양식이 바닥나지 않았던가. 이 때부터는 허기(虛飢)가 가장 큰 고통이었다. 무엇이든 닥치는대로 먹어야 했다. 나무뿌리도 캐먹고, 풀잎도 뜯어 먹어야 했다. 이렇게 보내야 했던 피난생활을 어찌 필설로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북진(北進)하는 국군을 따라 피난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전화(戰火)에 타다 남은 잿더미 위에서 다시 시작하는 생활은 참으로 처참했다. 그나마 쪼그라들었던 살림살이는 온데 간데 없고, 폭탄 맞은 집이라곤 앙상한 뼈대만 남아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염려스러운 安保意識

 

     6 ‧ 25 전쟁은 참으로 참혹했다. “아!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그 날 / 내 나라 내 민족끼리 죽이고 죽여야만 했던 /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던 그 날”(‘단장의 미아리 고개’의 대사의 일부)

     3년1개월여에 걸친 전쟁이 할키고 간 상처는 너무나도 컸다. 전국토(全國土)가 초토화되었고, 온 산야(山野)가 피로 물들었다. 어디 그뿐인가.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한국군 사망 149,005명, 부상 717명, 실종 132,256명이었으며, 남한의 민간인 손실은 사망 244,633명, 학살 당한 사람이 128,935명에 달하였다. 그리고, 1천만명이 넘는 이산가족(離散家族)이 속출했다.

 

     전쟁이 끝난 후 온 국민이 불렀던 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이해연이 노래한 ‘단장의 미아리 고개’가 전쟁의 상처를 말해주고 있었다.

 

“미아리 눈물고개 님이 넘던 이별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메일 때

당신은 철사줄로 두손 꼭꼭 묵인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러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고개”

 

     이 노래는 6 ‧ 25 전쟁의 비극과 가족을 잃어버린 아픔을 절절이 전달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안전행정부가 지난 5월 25일부터 6월 6일까지 여론조사기관 ‘리서치앤리서치’에 의뢰해 전국 19세 이상 성인남녀 및 중 ‧ 고교생 각각 1,000명을 대상으로 「국민 안보의식」을 조사한 결과, 성인 35.8%, 중 ‧ 고교생 52.7%가 6 ‧ 25 전쟁이 언제 발발했는지를 모르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동아일보 2013. 6. 24).

     뿐만이 아니다. 교사 10명 중 7명꼴로 “현재 학교교육과정에서 6 ‧ 25 전쟁에 대한 교육이 미흡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조선일보 2013. 6. 25). 6 ‧ 25 전쟁에 대한 교육이 미흡한 이유에 대하여 교사들의 68.6%(189)가 “6 ‧ 25 전쟁을 비롯해 통일 ‧ 안보 등 국가관이 희박해지는 사회분위기 때문”이라고 답했다(위 조선일보).

 

     그 동안 안보교육(安保敎育)이 얼마나 허술했는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햇볕정책’이다, ‘우리 민족끼리’를 외치면서 세월을 허송하는 동안 이 지경이 되고 말았다. 이제라도 자라나는 세대(世代)들에게 진실을 알려야 한다.

     우리가 6 ‧ 25 전쟁을 잊고 지내는 동안 북한은 핵(核) 개발을 통해서 우리를 위협하고 있으며, 국제사회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핵실험(核實驗)을 감행하고 있지 않는가.

     어디 그뿐인가. 2010년 3월 26일의 천안함(天安艦) 피격, 같은 해 11월 23일의 연평도(延坪島) 포격을 보면 알만하지 않는가.

     1968년 청와대를 습격했던 무장공비(武裝共匪) 김신조의 말에 귀기우려야 한다. “아무리 무기가 좋아도 정신이 무너진 군(軍)이 다루면 그건 고철(古鐵)”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 말을 되새기면서 전후세대(戰後世代)들에게 6 ‧ 25 전쟁의 진실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국방(國防)의 중요성을 일깨워줘야 한다. 나라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강우규(姜宇奎) 의사(義士)가 일제(日帝)에 의해 처형(處刑) 당하면서 남긴 피맺힌 절규(絶叫)를 여기에 옮기면서 이 글을 맺는다. “단두대(斷頭臺) 위에 올라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 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感懷)가 없으리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