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의 역사인물⑬ 조선 초 대마도 정벌의 주인공 이종무
용인의 역사인물⑬ 조선 초 대마도 정벌의 주인공 이종무
  • 김태근(태성중 교사, 용인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사&
  • 승인 2011.03.15 17:22
  • 호수 1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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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정벌의 일등공신 이종무
▲이종무 장군의 묘

⑬ 조선 초 대마도 정벌의 주인공 이종무


대마도 정벌의 일등공신 이종무


지난주는 3.1절 관련 기념행사가 많이 열렸다. 이때만 되면 우리는 일본에 의한 독도 영유권 주장으로 심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그런데 독도와 함께 우리 역사에서 민감하게 반응하게 만드는 땅이 또 있다. 바로 한국과 일본 사이 현해탄에 있는 대마도이다. 이 대마도는 일본 본토보다 우리나라가 훨씬 가깝다. 그래서 이 섬을 지배했던 도주(島主)들은 고려와 조선에서 주는 관직을 받고 조공을 바쳤다. 토지가 척박한 이곳 거주민들은 조선에서 식량을 얻어가야만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에 이르러 왜구들이 대마도를 거점으로 한반도의 해안지역을 다니며 노략질을 하기 시작했다. 왜구의 노략질은 여말 선초에 이르면 극에 달해 우리 백성이 겪는 피해는 너무나 컸다. 
세종 1년(1419년) 명나라로 향하던 왜선 50여 척이 갑자기 배를 돌려 충청도 비인현에 침입하여 병선을 불태우는 등 극심한 약탈을 자행했다. 이들은 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황해도까지 진출하자 조선군은 연평곶에서 포위하며 막아내고 있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왜구가 본거지를 비운 틈을 타서 그 뿌리를 뽑고자 쓰시마 섬을 정벌하려 하였다.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지만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태종은 조정의 반대를 물리치고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에게 명을 내려 대마도를 정벌케 하였다. 정벌군은 이종무의 지휘아래 전선 227척, 군사 1만 7천 명으로 구성되어 1419년 6월 중순 경상도 거제 앞바다 견내량에 집결했다. 그해 6월 19일, 거제를 출발한 조선 원정군은 하루 만인 20일 정오 무렵 대마도의 아소만을 점령하였다. 조선군은 대마도 도주에게 항복할 것을 종용하지만, 듣지 않자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왜구 104명을 죽이고 21명을 생포하였으며, 대소 선박 129척, 가옥 2천 여 호를 소각하였다. 또 왜구에게 붙잡힌 조선인 8명과 중국인 포로 131명을 구하는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조선군도 왜구의 기습을 받아 100여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어 조선군이 목책을 설치하는 하고 주요 길목을 차단하는 등 장기 주둔할 기세를 보이자 대마도 도주는 왜구의 단속을 약속하면서 화해를 요청하였다. 때마침 닥친 장마와 태풍으로 인한 피해를 우려한 조선군은 대마도 도주의 화해 제의를 받아 들여, 7월 3일 거제로 개선하였다.


그 후 1436년, 흉년으로 식량사정이 어려워진 대마도 도주는 조선 정부에 대마도를 조선에 편입시켜 줄 것을 간청하였다. 조선은 그 청을 받아들여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하고 도주를 태수에 봉했다. 또한 임진왜란을 일으킨 토요토미 히데요시 역시 대마도를 조선땅으로 보고 공격 대상지로 여기도 하였다.


대마도 정벌을 이끈 이종무는 고려 공민왕 9년(1360년) 이을진의 아들로 태어났다. 1381년 우왕 때 14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로 쳐들어온 왜군을 물리친 공으로 정용호군이 되었다. 조선 건국후인 1397년 옹진에서 만호의 벼슬에 재직 중 왜군이 다시 쳐들어와 성을 포위하자, 이에 끝까지 싸워 적을 물리친 공으로 첨절제사가 되었다가 돌아와 상장군이 되었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 때는 이방원의 편에 가담하여 방간의 군사를 괴멸시켰고, 이로 인해 1406년 익대좌명공신의 호를 받고 통원군에 책봉되었고, 의주 등지의 병마절제사로 승진되었다. 세종 원년에는 1419년 삼군도체찰사가 되어 쓰시마 섬을 정복하였다. 이 공으로 이종무는 장천군에 봉해졌다. 그러나 기습을 받아 전사한 박실 등의 손실에 대해 조정은 끈질기게 죄를 물었고 같은 해 11월 사간원 등에서 대마도 정벌에 불충한 자를 종군시켰다고 하여 이종무와 김훈, 이적 등을 처단할 것을 계속 간하였다. 세종은 이종무를 감쌌지만 결국 관직을 박탈당하고 평안도 상원으로 유배되었다가 1420년 6월 풀려나 과천에서 거주하게 된다. 1423년 사은사로 명나라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1425년 음력 6월 9일 향년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치니 세종은 양후(襄厚)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종무 장군의 묘는 용인시 수지구 고기동 산 79번지에 있다. 광교산 기슭 고즈넉한 자리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경기도 기념물 제25호로 지정됐다.


 대마도가 일본 정부에 정식으로 편입된 것은 1868년 메이지 시기의 일이다. 그러나 대마도에 대한 일본의 점유가 국제법상 선점은 아니고 일방적 점유이기에 정당성이 부족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근거로 내세우는 사실보다 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이다.


 3월 어느 날 이종무 장군의 묘를 바라보니 대마도 정벌처럼 적극적 대처가 확실하게 영토주권을 지키는 방법이 된다는 사실을 몸소 가르쳐주는 것 같다. 또 다가오는 2019년은 이종무장군이 대마도를 정벌한지 600년이 되는 해이다. 이때 용인지역 차원에서 3.1운동 100주년과 함께 이종무 장군의 유업을 기리는 뜻 깊은 기념행사를 계획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김태근(태성중 교사, 용인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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