容恕의 美德을 배우자
容恕의 美德을 배우자
  • 권용우<명예교수·법학>
  • 승인 2011.09.21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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容恕의 美德을 배우자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용서(容恕)란 무엇인가? ‘이미 저지른 죄나 잘못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을 주지 않고 관대하게 처리하는 것’이라고, 국어사전은 적고 있다.
로마의 스토아학파 철학자 세네카(Seneca, L. A. : BC. 4? ~ AD. 65)는 “용서를 받으려면 용서하라”고 설파했다. 영국의 낭만파시인 필립 베일리(Pillip J. Bailey : 1816 ~ 1902)도 “많이 용서하는 자가 많이 용서받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다. 나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용서의 미덕을 실천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에 큰 교훈이 된다.

    사례 1 : K 교수의 경우

내가 40여년간 각별히 지내온 K 교수의 경우는 이 난(欄)을 빌어 소개할 만한 가치가 있고도 남음이 있다. 사실인즉 이러하다. K 교수는 30여년간 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 석 ‧ 박사과정의 많은 제자를 지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제자들이 스스로 진로를 설정하고, 자신의 전공을 살려서 안정된 직장에 취업해서 자기몫을 다하고 있으므로, K 교수는 제자의 진로에 대하여 특별한 걱정은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지방대학에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G라는 제자가 서울에 있는 자기 모교의 교수공채에 응모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는 것이다.
K 교수의 말이다. “G가 교수공채에 응모해서 서류전형, 학장면접을 거치면서 잘 되는 듯 했다”고 한다. 그래서, G를 만나서 “내가 정년퇴임 후라서 교수공채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해 참으로 미안하다”고 했더니, G가 “교수님,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잘 될 겁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결과는 G의 생각과는 달리 채용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것이 G가 K 교수에 대하여 등을 돌리게 된 이유였다고 한다. G는 K 교수에게 전화로 “왜, 자기가 교수공채에서 탈락되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불만을 털어놓았고 한다. 그리고, G는 그 후로 발길을 끊었다는 것이다.
또, K 교수의 말이다. “제자인 G가 교수공채에 실패한 것이 어찌 G만의 아픔이었겠는가, 나도 너무 가슴이 아팠다”고 했다. 그리고, “제자의 앞길을 열어주지 못한 자기의 무능함이 너무 원망스러웠다”고도 했다.
그런데, K 교수의 마지막 말 한 마디가 나의 가슴에 와 닿았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영국의 정치가 겸 철학자 베이컨(Bacon, Francis : 1561 ~ 1626)의 “복수할 때 인간은 그 원수와 같은 수준이 된다. 그러나, 용서할 때 그는 그 원수보다 상위에 있다”는 명언을 나에게 상기시켜주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내가 “그 동안 깊은 애정을 쏟았던 제자가 등을 돌렸는데, 많이 서운했겠다”고 했더니, K 교수는 “내가 못난 탓이지요. 제자로부터 버림받은 교수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라는 짤막한 말을 남겼다.

K 교수의 ‘순(順)으로 역(逆)을 용서하는 너그러움이 나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K 교수의 이러한 너그러움을 지켜보면서, 문득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조조(曹操)의 결단이 떠오른다. 허도(許都)에 본진(本陣)을 두고 기주(冀州)의 원소(袁紹)와 결전(決戰) 중에 있었는데, 원소가 쫒기면서 버리고 간 문서 중에 조조의 부하들이 원소와 몰래 주고 받았던 편지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를 본 좌우에 있던 부하장수들이 조조에게 “모조리 이름을 밝혀내 죽여야 합니다. 이런 자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더니, 조조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빙그레 웃으면서 “원소의 세력이 강할 때 나도 마음이 흔들렸다. 내가 그러하였는데 딴 사람들이야 어떠했겠는가?” 그리고는 눈앞에 놓인 풀지도 않은 편지뭉치를 모두 태워버리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좌우를 둘러보면서 “앞으로는 이 일은 두 번 다시 입밖에 내지 말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는 실로 한 시대를 호령하던 장군다운 면모를 읽게 하는 관용(寬容)의 미덕이 아닐 수 없다.

K 교수와의 이러한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참으로 복 받은 교수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편 ‘나의 제자 가운데도 지도교수가 자기의 진로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고 불만을 가진 경우는 없을까?’ 하고, 새삼 제자의 면면을 그려보았다. 어느 제자가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K 교수의 경우처럼 나에게 직접 대놓고 불만을 말하는 제자는 없다. 더러는 삶에 바쁜 나날을 보내느라고 나에게 자주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가끔 전화로 안부를 물어오고 있으니 크게 안심이다.
더욱이, 몇몇 제자는 한 달이 멀다 하고 찾아와서 식사대접도 하고 간다. 또, 몇몇 제자들이 주선해서 ‘정년퇴임기념 고별강연회’도 성대히 베풀어주었고, 법학관련 ‘포럼’을 만들어서 나의 연구실에서 2,3개월마다 세미나도 개최하고 있다. 이 세미나가 끝나면 그 결과물을 모아서 한 권의 책으로 출판할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얼마 전에는 내가 「나도 멋지고 싶다」(도서출판 줌)라는 컬럼집을 출간했는데, 몇몇 제자들이 비용을 갹출해서 성대한 출판기념회도 베풀어주었다. 나는 K 교수에 비하면 참으로 행복한 교수가 아닌가. 나는 여러 모로 부족한 교수이지만 훌륭한 제자들을 만나서 큰 복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사례 2 : Y 교수의 경우

Y 교수의 경우는 25,6년간 거래해오던 출판사와의 관계였다. 그리고, 그 출판사 사장과의 30여년 이어온 친교관계의 흐트러짐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Y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Y 교수와 A 출판사와의 관계는 지금으로부터 25,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평소부터 잘 알고 지내던 B씨로부터 “Y 교수, 내가 출판사를 경영해보려고 하는데, 나를 좀 도와주세요. 나는 배운 것이 없으니, Y 교수가 출판사 등록에 따르는 계획서도 좀 작성해주시고---”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Y 교수는 어느 여름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B씨와 함께 땀을 뻘뻘 흘리면서 대한출판문화협회를 방문해서 ‘출판사 신규등록 관련서류’를 받아왔고, 바로 계획서를 작성했다고 했다. 그 당시에는 ‘3년간 1년에 3권 이상의 신간을 간행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는데, 그런 조건에 맞추어 계획서를 작성해서 제출했다고 한다. 그리고, 출판사 등록이 되었고, B씨는 당당히 출판사의 사장에 취임하였다. B 사장이 그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 몇몇 지인들을 초청해서 자축모임도 마련했다고 한다. Y 교수도 당연히 그 자리에 초청되었고, 참석자들을 대표해서 A 출판사의 장도를 비는 짧은 인사말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Y 교수는 이런 인연으로 종전보다 더 잦은 B 사장과의 만남이 있었음은 물론,  B 사장이 요청하는 저서 출간을 위해서 원고도 썼고 주변에 있는 교수들에게 권유해서 책을 출간토록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그러던 중 Y 교수는 교수직에서 정년퇴임을 했다고 한다.
Y 교수는 원래 부지런한 성격의 소유자여서 정년퇴임 후에도 현직에 있을 때 못지않게 학문에 정진하면서 제자 ‧ 후배교수들과 학문적 교유를 하고, 또 전공논문도 쓰고 컬럼도 부지런히 발표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물들을 묶어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어느 날  Y 교수가 보낸  컬럼집 한 권이 나에게 배달되었다. 머리말과 목차 정도만 대충 넘겨보고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에 예나 다름이 없는 쩡쩡한 목소리가 들러왔다. “예, Y입니다. 누구세요?”
우리 둘은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은 다음 내 쪽에서 아무 뜻 없이 “Y 교수, 이 번에 낸 책은 A 출판사가 아니네요?”라고 말했더니, Y 교수 쪽에서 A 출판사 B 사장과의 저간의 사정을 말하면서 몹시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Y 교수의 말이다. 얼마 전 B 사장에게 원고를 넘겨주고 책 출간을 준비 중이었는데,  A 출판사의 편집담당자로부터 전에 없이 책에 관해서 ‘몇 부를 찍겠느냐?’ ‘잘 팔리겠느냐?’는 등의 말을 들었단다. 그런 불쾌한 말을 듣고 출판사를 나서는 Y 교수에게 B 사장이 혼잣말처럼 “교수님, 제가 못나서요”라고 하더란다. 그제서야 Y 교수는  ‘아, 내가 정년퇴임한 교수지---’라고 하면서, 더 이상의 할 말을 잊었다고 했다.
Y 교수의 말은 계속되었다. “B 사장과의 인연이 30여년이 넘는데, 출판사의 재정이 어려워서 더 이상 나의 책을 출판할 수 없다고 말했으면 좋았을 텐데, 왜 편집담당자로 하여금 그런 불쾌한 말을 하게 했는지 모르겠다”라는 것이었다. Y 교수의 말은 계속되었다. “어떤 사정인지 모르지만, B 사장이 솔직하게 출판사의 사정을 말했더라면 책 출판은 아니더라도 30여년의 친교관계는 계속될 수 있었을 터인데!”라는 아쉬움을 말하면서, 우리 사이의 대화는 한참 동안의 침묵으로 이어졌다.

내가 오랫동안의 침묵을 깨고, “Y 교수, 두 분의 관계가 30여년 동안 참으로 돈독했는데---”라고 말을 이어갔다. 나의 말이 끝나자, Y 교수는 혼잣말처럼 나직한 목소리로 “나는 누구와 한 번 인연을 맺게 되면 그 인연을 한결같이 소중하게 이어왔는데---”라는 여운을 남겼다. 그리고, 이어서 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 1542 ~ 1629)의 유훈(遺訓) 한 토막을 나에게 들려주었다. “자기를 탓하되 남을 나무라지 마라.”
Y 교수의 이 한 마디 말을 들으면서 문득 프랑스의 극작가 빅토르 위고(Hugo, Victor-Marie : 1802 ~ 1885)의 “바다보다 큰 것은 하늘이요, 하늘보다 큰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라는 명언이 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Y 교수, 걱정하지 마세요. 좋은 원고(原稿)가 있는데 책 못내겠소”라는 혼잣말을 남겼다.

사례 3 : 일본의 韓日倂合과 북한의 蠻行

(1) 일본은 1905년 강압적으로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을 체결하고, 한국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통감(統監)에 의한 내정간섭(內政干涉)을 노골화하고 한국의 외교권(外交權)을 빼앗아갔다. 이로써 한국은 독립국가로서의 국제적 지위를 상실하고,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1910년 일본에 의한 한일병합(韓日倂合)으로 말미암아 한국은 일제(日帝)의 가혹한 식민통치(植民統治)에 시달리게 되었다.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자 통감부를 폐지하고 총독부(總督府)를 설치하여, 총독(總督)으로 하여금 한국에서의 입법권 ‧ 행정권 ‧ 사법권을 행사하게 하였다.
이것이 일본에 의한 가혹한 무단정치(武斷政治)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일제는 식민지배의 수단으로서 토지의 수탈과 한국인의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를 획책하였다. 또, 1920년대에 들어와서는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의 명목으로 미곡(米穀)의 수탈을 획책하였다. 이에 더하여, 금 ‧ 은 ‧ 철 등의 지하자원을 하나도 남김없이 약탈해갔다. 이제 이 땅에 남은 것은 그저 발가벗긴 힘없는 식민지의 백성이 있을 뿐이었다. 
일제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이니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우면서 민족말살정책(民族抹殺政策)을 자행하였다. 그리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한글로 발행되는 신문을 모조리 폐간함으로써 우리의 눈을 가렸다. 창씨개명(創氏改名)은 또 우리 민족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남겼던가. 창씨개명을 자행하면서 “한국인의 희망에 따라 행해졌던 것”이라고 둘러대기도 하였으니, 말문이 막힐 따름이다.
어디 그 뿐이었던가. 날조된 105인(百五人) 사건, 민족주의자 181명을 검거한 동우회(同友會) 사건,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 때 재일본(在日本) 한국인의 대학살(大虐殺) 사건, 수많은 기독교 신자(信者)를 투옥한 기독교반전공작(基督敎反戰工作) 사건, 국학연구(國學硏究)를 탄압하기 위하여 조작한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사건 등은 그들의 마각(馬脚)을 들어낸 대표적인 사건들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기 조차 끔찍한 일들이 아니던가!
그리고, 일본은 1941년 12월 미국 ‧ 영국 등 연합국에 대하여 전면전쟁을 도발하고, 전쟁물자의 생산을 위하여 우리 한국인을 징용하였으며 우리의 젊은이들을 전장(戰場)으로 내몰았다. 또, 일본군 위안부(慰安婦)로 끌러가서 젊음이 산산이 부서진 우리 할머니들의 찧어진 가슴을 누가 어루만저 준단 말인가?
아, 슬프고, 슬프도다! 35년간의 잔혹한 질곡(桎梏)에서 헤메었던 우리 2천만 겨레의 고통을 어찌 다 말하고 쓸 수 있겠는가!

이 뼈에 사무치는 아픔을 달래면서, 어떤 이는 중국으로, 또 어떤 이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풍찬노숙(風餐露宿)의 생활역정(生活歷程)을 이겨내면서 오로지 조국의 광복(光復)을 위하여 대일투쟁(對日鬪爭)에 신명(身命)을 바쳤다. 그리고,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우리 2천만 민족은 분연히 일어섰다.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 일제(日帝)의 기만(欺瞞)도, 그들의 총칼도, 그들의 어떤 회유(懷柔)도 우리의 뜨거운 가슴을 막아 설 수는 없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정각! 서울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和館)에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한용운(韓龍雲)이 ‘3 ‧ 1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다음 대표일동이 대한독립만세를 3창함으로써 독립운동의 불길은 3천리 방방곡곡에 퍼져나갔다.

‘일인총독의 총칼아래 희고 푸른 민족정기(民族精氣)를 무지개같이 뿜어낸’ 그 날의 성스러움이, ‘민족자결(民族自決)의 고함치는 그 날의 독립만세 소리’, ‘맨주먹 빈손으로 고함치며 거리로 달렸던’ 우리 민족이 아니었던가.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광복의 그 날을 맞았다. 정의(正義)는 누구도 가로 막을 수 없었다.

    (2) 북한의 만행(蠻行)은 또 어떠한가.
그 시작은 1950년 6 ‧ 25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괴군(北傀軍)이 소련제 T - 34 탱크를 앞세우고 38선 전역에 걸쳐 일제히 공격을 개시함으로써 시작된 동존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인 6 ‧ 25전쟁은 우리에게 너무나 가혹한 참화(慘禍)였다. 갓 태어난 대한민국이 기틀을 채 갖추기도 전에 졸지에 당한 황담함이었다. 우리 국군은 전쟁이 발발한지 불과 3일만에 수도(首都) 서울을 적(敵)에게 점령 당하고, 채 두 달도 되지 않아 낙동강(洛東江)까지 밀려나고 말았다.
포성(砲聲)에 놀라 새벽 단잠에서 깨어난 시민들은 짐을 꾸리고, 피난길에 올라야만 했다. 정처없이 그저 남으로, 남으로 이어졌다. 더러는 맨몸인 채로, 더러는 보리쌀 두어되를 등에 메고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그 길을 떠나야 했다. 부모 잃은 아이들의 울부짖음, 총탄에 상처를 입고 피흘리는 사람들의 신음소리, 짐보따리를 잃어버린 아넥네의 넋나간 모습들이 뒤엉켜 있는 피난길은 그야말로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다.
정부는 수도 서울을 적에게 넘겨주고 대전(大田)으로, 대전에서 대구(大邱)로, 대구에서 다시 부산(釜山)으로 옮겨가야만 했다. 이러는 사이에 UN군 사령부가 설치되고,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友邦國)들이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반격(反擊)의 기회를 맞기도 하였다.  인천상륙작전(仁川上陸作戰)이 성공적으로 수행됨으로써 9월 27일에는 중앙청(中央廳)에 태극기(太極旗)를 게양하고 수도 서울을 탈환하는 기쁨을 누렸다. 서울을 탈환한 국군과 UN군은 패주하는 북괴군을 쫓아 북진(北進)을 계속하여, 9월 30일에는 마침내 38선에 이르렀다. 10월 19일에는 평양(平壤)에 입성하였으며, 26일에는 국군 제1진이 압록강(鴨綠江) 초산(楚山)에까지 진격하였다. 우리가 그리던 조국통일(祖國統一)이 눈앞에 닿아 있었다.
그러나, 10월 25일 중공군(中共軍)의 개입으로 다시 전세(戰勢)가 기울기 시작했으며, 그 악명 높은 인해전술(人海戰術)로 국군과 UN군은 작전상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6 ‧ 25전쟁은 밀고 밀리는 3년여에 걸친 장기전(長期戰)으로 변하고 말았다.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북괴군의 숨박꼭질이 반복되기도 했다. 3년 1개월여에 걸친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는 너무나도 컸다. 전국토(全國土)가 초토화되었고, 온 산야(山野)가 피로 물들지 않았던가. 그리고, 피아(彼我)간 인적 ‧ 물적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대한적십자사의 「離散家族白書(1976년)」에 의하면,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한국군 사망 149,005명, 부상 717,083명, 실종 132,256명이었으며, 이 밖에도 미군 사망 약 35,000명, 부상 약 100,000명으로 추산된다. 그 뿐이 아니다. 남한의 민간인 손실은, 사망 244,633명, 학살 당한 사람이 128,935명, 이북으로 납북된 사람이 84,532명이며, 실종자는 무려 303,212명에 달한다. 북한의 인적 손실은 3백만명 이상이었는데, 당시 북한의 인구가 1천만명 정도였음에 비추어 볼 때 그 숫자는 엄청난 것이었다.
전쟁의 피해는 이 뿐이 아니었다. 우리 남한의 재산손실은 무려 20억 달러였는데,  이 액수는 1949년 남한의 국민총생산액(GNP)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문득, 광복 60주년을 기념하여 2005년 8월 전쟁기념관(戰爭紀念館)에 마련된 「아! 어머니전(展)」이 머리를 스쳐지나간다.  “1950 ~ 1953년 전쟁, 그 참혹한 상처” 코너에 걸려 있었던 문구들이 다시 가슴에 찡하게 다가온다. ‘6 ‧ 25전쟁은 참혹했다.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참전한 남편과 아들을 대신해 여성들은 가족을 이끌고 험난한 피난길에 올랐고, 후방에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콩나물장사 ‧ 양말장사 ---, 나라를 지키겠다며 직접 총을 멘 여자의용군도 생겨났다. --- 1953년 7월 휴전이 되었을 때, --- 전쟁미망인의 수는 30만명이었다. ---’
눈물이 피잉 돈다. 그런데, 6 ‧ 25전쟁이 남긴 인적 ‧ 물적 손실이 이처럼 어마 어마한 것이었지만, 이보다 더 큰 상처는 민족분단(民族分斷)의 고착화와 남북간의 불신(不信)의 골을 더욱 깊게 했다는 데 있다. 또, 전쟁이 할키고 간 한반도(韓半島)에 남북으로 갈라진 1천만 이산가족(離散家族)의 아픔은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단 말인가!
  
북한의 만행은 6 ‧ 25전쟁으로 그 끝이 아니었다. 그들의 잔혹함은 현재에도 진행형이다.
우리는 지금도 1968년 1월 21일의 북한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기습을 노렸던 사건을 잊을 수 없다. 이들 공비(共匪)들은 한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휴전선을 넘어와 서울에 잠입하는데 성공, 세검정 고개의 자하문(紫霞門)을 통과하려다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고 그들의 정체가 드러났다. 이에 무장공비들은 검문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했으며, 지나가는 시내버스에도 공격을 가하였다. 그 현장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같은 해 10월 30일 울진 ‧ 삼척에 무장공비 120명이 침투하여 민간인들을 무차별 살상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잔당 5명이 북으로 도주하던 중 12월 9일 이승복 일가를 덮쳤다. 그 때 아홉 살짜리 초등학생 이승복 군이 무장공비를 향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자, 그들은 이 군을 무참히 살해했다. 이것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반공영웅(反共英雄) 이승복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밖에도 북한의 만행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만큼 많다. 1974년 8월 15일 육영수(陸英修) 여사 피격사건, 1976년 8월 18일 판문점(板門店) 도끼만행사건, 1983년 10월 9일 미얀마 아웅산 테러, 1987년 11월 28일 KAL기 폭파사건, 1996년 9월 18일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1999년과 2002년 두 차례의 연평도 해전(海戰).
또, 2010년에 있었던 천안함(天安艦) 침몰사건과  연평도(延坪島) 해안포 공격을 우리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북한이 연평도의 민가(民家)를 포격한 것은 천암함 폭침 이후 남한의 해이해진 안보(安保)의 틈새를 노린 소행으로 판단된다. 청와대 ‧ 국방부 ‧ 국민 할 것 없이 천안함 폭침 이후 아무 대책 없이 넋 놓고 있었으니, 김정일 호전집단(好戰集團)이 ‘바로 이 때다’ 하고 저지른 만행이었다.

2010년 연평도 포격으로 북한의 ‘평화의 가면(假面)’은 벗겨진 것이다. 이제 우리가 정신을 차릴 때이다. 1968년 청와대를 기습하려했던 ‘무장공비’ 김신조의 말에 우리 모두가 귀기우려야 한다. “우리(공비)가 청와대 근처까지 간 것은 남한이 정신을 못 차렸기 때문인데, 아직도 남한은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고 했다. 그는 또 “적과 싸우겠다는 정신자세가 없다.” “아무리 무기가 좋아도 정신이 무너진 군(軍)이 다루면 그건 고철(古鐵)”이라고도 말하지 않았던가.
  
(3) 우리는 일본의 35년간 가혹한 식민지배, 북한의 6 ‧ 25 불법남침과 그에 이어지는 만행은 어떠한 경우에도 이를 용서할 수 없다. 사람이 저지른 잘못에는 용서할 수 있는 것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렇다. 사사로운 잘못은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지만, 그것이 공적인 것인 때에는 그러하지 않다.
 
1910년 8월 29일. 그로부터 100년이란 세월을 훌쩍 넘겼지만, 그 때의 뼈아픈 기억을 잊어버리고 일본을 용서하기에는 아직도 상처가 너무 깊게 남아 있다. 그런데, 일본은 이러한 잘못에 대한 반성과 사죄는 커녕 아직도 ‘독도(獨島)가 일본 땅’이라는 생떼를 쓰고 있지 않는가. 올 3월 30일에는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내용이 실린 중학교 사회교과서의 검정을 통과시켰으며, 외교청서(外交靑書)에도 이를 그대로 반영하였다. 이에 앞서 2005년 시마네현(島根縣) 의회는 ‘다케시마(竹島 : 獨島의 일본식 표기)의 날’을 제정하여, 독도에 대한 야심을 노골화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처는 반(反)역사적 행위이며, 대한민국에 대한 침략행위이다. 일본 정부는 입으로는 미래지향적인 한 ‧ 일관계를 외치면서 그 속내는 미래의 주인공인 청소년들에게 양국관계에 부정적인 교육을 하기 위한 계획을 치밀하게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이웃이 무엇인지를 망각하고 있는 나라이다.
어디 일본뿐인가.  북한은 그 동안 앞에서는 평화공세를 펴면서 뒤에서는 공격준비를 진행하고 있지 않았던가. ‘한반도 비핵화합의’를 깨고 핵무기를 개발하였으며, 이제는 공개적으로 우라늄핵폭탄 제조를 선언하고 나섰으니 말이다. 또, 그들은 핵무장을 위한 두 차례의 핵실험을 감행하지 않았던가.
    북한은 그 동안 ‘민족(民族) 끼리’를 내세우며, 쌀도 받아가고 비료도 받아갔다. 어디 그 뿐인가. 얼마나 많은 현금도 받아갔던가 말이다. 그러고도 무엇이 부족해서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는 동족(同族)의 삶의 터전에 포탄을 퍼부었단 말인가. 어디 그 뿐인가. 불쑥 불쑥 ‘서울 불바다’를 내뱉기도 하고 있지 않는가.

일본의 몰염치한 일련의 행위와 북한의 만행은 용서의 대상이 아니다. 잊을 수도 없다. 냉정하게 이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행태를 되짚어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 대한민국은 이를 앞날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권용우<명예교수·법학>
권용우<명예교수·법학>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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