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의 우수(憂愁)
2011년의 우수(憂愁)
  • 안숙현(교양학부) 전임 강사
  • 승인 2012.01.04 00:36
  • 호수 13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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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의 우수(憂愁) 

안숙현(교양학부)전임강사

  “내 슬픔을 누구에게 호소할까?” 체호프의 단편소설 「우수(憂愁)」에 나오는 첫 문장이다. 주인공인 마부 이오나는 아들이 죽은 지 일주일이 되어가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아들 얘기를 하지 못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가운 밤중에 잠들지 못한 이오나는 결국 마구간으로 가서 ‘말(馬)’에게 아들의 죽음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며칠 전 나는 TV드라마「브레인」에서 이와 같은 인상적인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본 후, 이강훈(신하균 분)은 멍하니 병실 밖 의자에 앉아 옆에 다가온 환자 이영옥 할머니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을 정신없이 말한다. 들어줄 상대가 생기자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강훈은 강훈대로 각자 자신의 얘기만을 ‘동시에’ 긴 독백처럼 토해낸다. 상황과 처지는 전혀 다르지만, 이들은 1886년의 이오나처럼 ‘말하기’에 목말라있었던 것이다. 순간, ‘호소하지 못해서’ 죽어가는 이 시대의 모습을 나는 그들에게서 보았다. 그리고 분주한 일상에 노예가 되어 그들을 외면해버린 나를 마주하고 가슴이 에이는 아픔을 느꼈다.

  지난 가을에 나는 사랑하는 제자를 잃었다. 2011년을 돌아보고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을 떠나보냈다는 사실이다. 출석도 열심히 했고 성실해보였던 한 학생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아이의 괴로움을 읽지 못한, 듣지 못한 나의 메마른 감정에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지금 우리 아이들이 죽어 가는지도 모르고, <말하기 기초> 담당교수인 나는 21C 사회에서 ‘말하기’가 지닌 중요성을 열심히 강조했다. 취업전쟁에서 승리하도록 프레젠테이션과 토론 · 면접 등을 학생들에게 설명하고 그들을 훈련시키면서, 신자유주의 경쟁사회와 소통하는 외적 방법만을 강조했던 것이다. 정작 자신과, 가정과, 주변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우리 학생들의 신음소리를 외면하면서 말이다.

  제자의 자살 소식을 들은 다음 날부터, 나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고민을 교수자인 나와 함께 나누자고 호소에 어린 신신당부를 했다. 그 후 학업 문제와 학우들과의 관계로 괴로워하는 한 여학생에게서 메일이 왔다. 겉으로 보기에는 명랑하고 아무 문제가 없어보였던 아이의 내면에 많은 괴로움과 고통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수업진도에 급급했고, 내 학문 연구에 여유를 잃었던 지난 학기들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이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우리 아이들이 어떤 괴로움에 처해있는지, 어떤 상처를 받고 있는지 살피며 이들 한명 한명의 이름을 더 열심히, 더 세심하게 불러야 하지 않았을까.

  2011년 12월은 학교폭력과 ‘왕따’ 문제로 비롯된 대구 중학생 · 대전 여고생 자살이 우리 사회를 흔들어놓았다. 어린 학생들의 고통을 제대로 ‘들어주지’ 못한 교사들, 친구들, 우리의 가정 등 이것이 우리 현사회의 ‘귀머거리’ 모습이다.

  몇 년 전 스토리텔링 학회에서 만난 영국 스토리텔링 전문가의 발표가 생각난다. 그는  자신의 고민을 마음껏 토로하고 서로 들어줄 수 있는 공식적인 말하기 카페가 영국에는 그들 주변 곳곳에 있다고 말하면서, 영국인들의 독특한 스토리텔링 문화를 소개했다.
  청중들 앞에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이런 말하기 카페를 당장 만들 수 없을지라도, 지금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그건 아이들의 눈을 맞추고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귀를 더 열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2012년에는 12월 32일이 있다는 마음으로, 학생들의 말을 ‘여유있게’ 들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더 기도하는 한 해가 되도록 무릎을 꿇어야겠다. 
안숙현(교양학부) 전임 강사
안숙현(교양학부) 전임 강사

 drama77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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