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기자석] 살았지만, 죽었다.
[주간기자석] 살았지만, 죽었다.
  • 서준석 기자
  • 승인 2012.03.08 11:47
  • 호수 13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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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동안 심심풀이로 했던 과외 아르바이트 덕에 기자는 청소년들과 마주칠 일이 많았다. 나름 세대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이제 고등학교 3학년이 된 남동생도 있기 때문에 더 그럴 것이라 자부했다. 그런데 청소년들과 접촉할 때 마다 ‘혹시 내가 신세계에 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게 되었다. 외국어를 하는 것도 아닌데 알아들을 수 없는 수많은 은어들과 이해할 수 없는 문화들. 참 혼란스러웠다.

그 중 기자를 가장 실소하게 만든 것은 ‘찐찌버거’라는 단어였다. 사전을 아무리 뒤져봐야 나올 이 없는 이 이상야릇한 단어는 ‘찐따, 찌질이, 버러지, 거지’의 앞글자만을 따서 만든 그들만의 언어다. 재미있지만, 동시에 조금 슬프기도 하다. 기자가 질풍노도의 시기를 격을 당시, 물론 왕따를 당하거나 좀 덜 떨어진 친구를 부르는 말로 ‘찌질이’ 정도의 단어는 널리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의 단어로는 부족한 모양이다.

또 하나 충격을 준 이야기는 청소년들이 교복처럼 입고 다니는 겨울점퍼의 상징 ‘노스패딩’에 관련된 이야기다. 남극탐험이나 히말라야 등반을 할 때나 입는다는 그 고가의 패딩점퍼가 청소년들에게는 누구나 한 벌씩은 가지고 있는 겉옷일 뿐이다. 그런데 기자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따로 있다. 이 점퍼는 모델에 따라 가격차이가 나는데 30만 원대 후반의 제품을 입으면 찐찌버거라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60~70만 원대의 제품을 입어야 친구들 사이에 인정받을 수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다. 지독히도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신 기자의 아버지의 말을 따르자면 이들은 확실히 ‘대가리에 똥만 찬 것들’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 하나는 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머릿속에 오물을 채워 넣지는 않았을 것이란 거다. 값비싼 점퍼를 입지 않으면 인격적 모독을 당해야 하는 이 시대는 대체 누가 만든 것일까? 과도한 경쟁사회 속에 자신의 개성을 포기한 채 그저 비싸기만 한 것들로만 치장해야하는 이 세대가 조금은 안타깝게 느껴진다.

이러한 청소년기를 보내고 막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들. 이들에게 잔디위에 누워 캠퍼스의 낭만을 즐긴다거나 동아리방에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 선배와 노닥거리는 일 따위는 어떤 의미일까? 점점 사라져가는 잔디밭과 소리 소문 없이 문을 닫는 동아리들이 이 의문에 대신 답하고 있다.

며칠 전, 한 지인으로부터 “대학신문? 그런 거 뭐 하러 해. 내 동생도 대학신문사 기자하겠다고 설레발치다가 결국 성적부진해서 자퇴했잖아”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명치끝이 뜨끔거리고 아팠다. 기자는 대학이 결코 단순한 지식만을 가리키는 곳은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다. 행여나 저 끝에 가서 내가 원하던 것이 없다고 해도 지금은 있다고 믿고 싶다. 스무 살,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에 안성맞춤이 아닌가 싶다. 살아있다면 파닥파닥 살아 움직여야 하는 것이 맞다. 이전까지는 어떻게 살아왔든 이제는 수동적이고 획일적이었던 경쟁의 삶속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블루오션을 찾아 항해를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

서준석 기자 seojs05@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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