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묵처방] 대나무 숲과 마음 열기
[백묵처방] 대나무 숲과 마음 열기
  • 허재영(교육대학원 교육학과) 교수
  • 승인 2012.10.09 19:01
  • 호수 13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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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사회적 관심을 끌고 있는 ‘출판사 옆 대나무 숲 계정 현상’은 분명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서 자신이 당한 억울한 사연을 트위트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심리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동화적 발상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계정의 이름을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나는 말하기와 쓰기를 가르치는 사람이다. 말하기와 쓰기는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언어 행위에서 말하기는 듣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쓰기는 읽기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런데 언어 현상에는 재미있는 것들이 참 많다. 언어적 표현에서 대등한 두 말이 합쳐져 새로운 말을 만들 때에는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 앞에 온다. 예를 들어 ‘남녀’나 ‘노소’의 경우는 ‘남자’나 ‘노인’을 우대하는 사회에서 생성된 말임을 알 수 있다.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국어의 어휘를 통해서 사회를 조명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남녀’와 ‘노소’가 합쳐진 ‘남녀노소’는 어떨까? 근대 계몽기 이전의 문헌 가운데 상당수는 ‘남녀노소’보다 ‘노소남녀’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조선시대의 사회 구조가 ‘남녀 관계’보다 ‘노소 관계’가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한자어와 고유어가 서로 다른 어순을 보이는 말도 많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한자어 ‘주야’는 ‘낮’에 해당하는 ‘주’가 먼저 오고 ‘밤’에 해당하는 ‘야’가 나중에 온다. 그런데 고유어에서는 ‘밤’이 먼저 오고 ‘낮’이 나중에 온다. ‘생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고유어에서는 ‘죽자 살자’, ‘죽사릿길’ 등과 같이 ‘죽음’이 앞에 쓰인다.

‘말하기’와 ‘듣기’는 어떨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말하기’를 앞에 두고 ‘듣기’를 뒤에 쓰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대나무 숲 현상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표현 욕구를 갖고 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울음을 터뜨린다. 우는 것 자체가 표현의 시작이다. 쓰기도 마찬가지이다. 흔히 어린 아이가 있는 집에서는 도배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글의 의미나 그림의 의미를 알지 못하더라도 사방에 낙서를 한다. 역시 쓰기의 시작이다.

문제는 소통이다. 현재 국어과 교육과정의 영역 구성을 살펴보면 ‘듣기·말하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왜 듣기가 먼저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역시 표현보다 소통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나무 숲 현상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또한 소통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소통할 수 없으니 트위터라는 대나무 숲에서 마음껏 답답함을 표현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고민해 보아야 할 또 하나의 문제가 있다. 대나무 숲 현상의 긍정적인 면이나 부정적인 면, 또는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 등을 근본적이고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일은 사회학자들의 몫일 것이다. 요인 분석이야 어떻든 이 현상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소통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일이다. 소통은 말 그대로 ‘서로 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해야 장벽을 허물고 통할 수 있는가? 중요한 것은 역시 ‘마음의 문제’일 것이다. 마음을 열어야 소통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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