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끌같이 없어지고 진흙같이 다 마른다
티끌같이 없어지고 진흙같이 다 마른다
  • 김철웅 연구원
  • 승인 2012.11.20 16:54
  • 호수 13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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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대학 소장고서 65. 『이춘풍전』

65. 『이춘풍전』

티끌같이 없어지고 진흙같이 다 마른다

 

▲일하는 양반의 모습을 그린 김홍도의 풍속화.

조선후기에 책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방각본(坊刻本)이 간행되어 독서 인구의 확대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른바 ‘방각본’은 민간에서 영리를 목적으로 간행한 것이다. 그러나 책을 유포하는 보편적인 방법은 손으로 베껴 쓰는 필사(筆寫)였다. 특히 인기 있는 소설들은 대부분 필사되어 읽혀졌다. 그런데 필사 과정에서 제목과 내용에 차이가 생기게 되어 많은 이본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춘풍전」 역시 조선후기 사람들이 널리 애독한 책이었는데, 필사본이 많이 남아 있다. 우리 대학에는 츈풍젼, 니츈풍젼, 이춘풍전 등 여러 제목을 가진 한글 필사본이 있다. 필사본 중에는 간혹 한자를 섞어 쓴 것도 있다. 한 필사본에는 “임□년(□은 판독불가) 필초하노라”라고 하여 필사 연대를 표기한 경우도 있다.


  이 소설의 무대는 조선시대 서울이다. 주요 등장 인물은 이춘풍, 춘풍의 처 김씨, 평양 기생 추월 등이다. 주인공은, “나라와 백성이 두루 평안하던 숙종대왕 즉위 초에 서울 다락골에 사는 성은 이(李)요 이름은 춘풍(春風)이라. 집안은 장안의 거부(巨富)이나 혈육이 오직 춘풍 뿐이라 부모가 항상 사랑하여 길러내니 인물이 옥골이오 헌헌장부”인 인물이었다. “춘풍은 양친이 일시에 세상을 뜨니 삼년상을 마친 후 경계할 이가 없어져 하는 일마다 방탕하며 주야로 노닐며 누만금을 헛되이 낭비하여 재산이 티끌같이 없어지고 진흙같이 다 마른다.” 신세를 한탄하는 부인 김씨에게 춘풍은, “술 잘 먹는 이태백은 매일 취하였어도 한림학사를 지냈으니 나도 나중에 잘되어 일품 벼슬하고 이름을 후세에 전하리라.”고 큰소리만 친다. 결국 부인 김씨는 작심하여 재물을 모으기 시작하여 4, 5년만에 수천 금을 모아 다시 가세가 풍족해진다. 그러자 춘풍은 다시 교만한 마음이 생겨 호조에서 돈 이천 냥을 빚내어 평양으로 장사를 떠나려 한다. 춘풍은 말리는 아내를 윽박지르고 집안 재물을 다 털어서 떠난다.

평양에 온 춘풍은 “얼굴은 밝은 달 같고 모란꽃이 아침 이슬에 반쯤 핀 형상”을 한 기생 추월에게 빠지게 된다. 춘풍은 추월에게 빠져 돈을 모두 탕진하고 만다. 추월은 돈이 떨어진 춘풍을 박대하고 급기야 춘풍은 추월의 집에서 하인 노릇을 하며 지낸다. 남편 소식을 들은 김씨는 평양감사로 부임하는 참판댁 아들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여 남자 복장을 하고 비장으로 따라간다. 김씨는 추월과 춘풍을 질책하고 춘풍에게 돈을 찾아주며 어서 서울로 돌아가라고 호통 친다. 춘풍이 제집을 찾아와 하는 말이, “좋은 안주 호강으로 지내고 집에 오니 온갖 것이 다 어설프다. 다시 평양으로 내려가 음식을 먹으리라.”고 허세를 부린다. 이날 밤에 춘풍의 처는 다시 비장 복장을 하고 춘풍을 찾는다. 춘풍이 놀라 아내가 알까봐 전전긍긍한다. 잠시 후에 탕건과 도포를 벗고 정체를 알리니 춘풍은 개과천선하게 되고 부부는 잘 살게 된다.


  이 소설은 조선후기를 배경으로 몰락한 양반 부부를 주인공으로 하여 당시의 삶을 잘 그려내고 있다. 즉 경제적으로 무능하고 방탕을 일삼는 이춘풍과 이를 선도하는 부인 김씨를 통해 당시 세태를 풍자한다. 무능하고 방탕한 남편, 몰락한 가정을 유능하고 슬기로운 아내가 구해낸다는 내용을 통해 남성 중심의 허위 의식을 폭로한다. 춘풍은 부모가 물려준 재산과 아내가 고생해서 번 돈, 심지어 호조에서 빌린 돈까지 유흥과 방탕한 생활을 하는 데에 모두 써 버린다. 부인 김씨는 전통적인 유교사회 속에서 고난을 감수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여인으로 등장한다. 또한 이 소설은 몰락한 양반들의 허세, 조선후기의 상업 발달과 전통 가치관의 혼란을 묘사함으로써 조선후기 사회를 풍자한다. 남자, 양반의 향락과 풍류를 비판하며 그 속에서 가장의 권위는 허세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부인 김씨는 무능력한 양반 남자를 대신에 스스로 경제 활동에 나서는 적극적인 여성이다. 부인 김씨는 수동적인 전통 여성이 아니라 주체적인 근대의 여성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벼슬과 입신양명을 중시하는 춘풍, 그런 춘풍을 떠나지 못하는 김씨에게서 전통과 근대의 가치관이 뒤섞여 있음을 본다.
김철웅(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김철웅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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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m9963@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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