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구공' ⑦ 삐삐부터 LTE까지
고고구공' ⑦ 삐삐부터 LTE까지
  • 김상천 기자
  • 승인 2012.11.20 22:26
  • 호수 13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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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휴대폰의 진화는 ‘밀어서 잠금해제’
▲ 2000년대 초반 ‘열지 않고도 본다는’는 카피를 내걸고 출시했던 모 사의 휴대폰.

90년대 후반 어느날 ‘문자삐삐(문자메시지 송·수신 기능이 있는 무선호출기)’가 세상에 나왔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세상에 과학이 이렇게나 발달하다니!”였다. 문자삐삐는 탄생과 동시에 1천500만 삐삐 이용자들의 로망으로 떠올랐다. 당시 중학생이던 나는 족발집 전단지 배포 아르바이트로 모아놓은 돈이 좀 있었다. 담배 피는 형들한테 뺏길까봐 깔창 밑에 숨겨 다니던 그 돈은 나를 전교 최초로 문자삐삐를 쓰는 얼리어답터로 등극시켜줬다.

막상 사놓고 보니까 실용성은 바닥이었다. 문자삐삐를 가진 다른 친구가 없으니 문자기능이 있으나 마나였던 것이다. 녹음된 음성을 알바들이 듣고 타이핑해서 문자로 쏴주는 서비스(!)가 생기기도 전이었다. 이 제품의 실용성은 다른 방식으로 발현됐다. 모르는 옆 반 여자애들이 보여달라고 찾아오던 것이었다. 음…. 끄덕끄덕,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2000년대로 넘어와 휴대폰이 대중화되면서 주머니 속의 삐삐들은 책상 서랍으로 자리를 옮겨야만했다. 그러던 어느날 한 회사에서 폴더 뚜껑에 동그랗게 창을 만든 ‘듀얼폴더’ 휴대폰을 내놨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 의자에서 엉덩이가 붕 떴다. “세상에 폴더를 안 열고도 시계를 볼 수 있다니, 대체 누가 이렇게 혁신적인 디자인을!” 이번에는 동네 피씨방 게임대회 우승상금이 있었다.

분식집에서 내 휴대폰을 떡볶이접시 옆에 꺼내두기만 하면 아무도 몇 시냐고 물어보는 일이 없었다. 내장 뺀 순대를 시켜먹던 옆 자리 여학생들로부터 힐끗힐끗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지면 우리는 시크하게 떡을 씹으며 휴대폰을 들고 ‘폴더를 열지 않은 채’ 시간을 확인하곤 했다.

탁자 위에 올려둔 아이폰이 세포분열을  하듯, 한밤중에 부르르르 온몸을 떤다. 놀라서 자다 말고 화들짝 깼다. 뭔가 무슨 일인가. 애니팡과 드래곤플라이트 점수 자랑은 분명히 차단했을 텐데. 눈을 찌르는 환한 빛 너머로 확인하니 아이러브커피를 해보시란다. 제발… 살려주라… 부탁할게….

결국, 마침내, 기어이, LTE까지 와버렸다. 바야흐로 4세대 이동통신의 세상이다. 바야흐로, 호모사피엔스는 세대와 세대와 세대와 세대를 넘어, 이동하는 도중에도 빠름 빠름 빠름한 속도로 통신할 수 있게 됐다. 지하철에 앉아 휴대폰으로 다대일통신 중에 학교 앱을 켜 도서관에서 빌릴 책을 예약해놓고 미국드라마 한 편을 보는 일에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않게 됐다.

멈춘줄로만 알았던 인간의 진화는 밀어서 잠금해제 된 것인가. 또 다른 세대와 세대를 넘어가는 동안 휴대폰 이름에 붙는 숫자들은 또 다시 올라가겠지.  그런데 웬일인지 이제 더 이상 얼리어답터가 되고 싶지 않다. 이제는 이 게임을 끝내고 싶다. 휴대폰은 발달할수록 점점 징그러워진다. 어떻게 된 걸까. 문제는 무엇인가. 헛! 소설가 박민규의 ‘씨네 21’ 칼럼 제목에서 알아버렸다.

‘죽느냐 사느냐(To buy or not to be), 그것이 문제로다.’

김상천 기자 firestarter@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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