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도끼 자루를 다듬을 때에는 헌 도끼 자루를 기준으로 삼는다
새 도끼 자루를 다듬을 때에는 헌 도끼 자루를 기준으로 삼는다
  • 김철웅 연구교수
  • 승인 2012.11.28 21:00
  • 호수 13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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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대학 소장고서 마지막 회 66. 정인지의 『고려사(高麗史)』

마지막 회 66.  정인지의 『고려사(高麗史)』

새 도끼 자루를 다듬을 때에는 헌 도끼 자루를 기준으로 삼는다

▲북한에서 출토된 태조 왕건의 청동상.

34명의 국왕이 즉위하여 475년 동안 존속하였던 고려의 역사는 『고려사』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조선을 건국하자마자 태조 이성계는 조준, 정도전 등에게 고려 역사의 편찬을 명했다. 그러나 이러저런 이유로 편찬과 수정을 반복하다가 일을 시작한 지 57년 만인 1451년(문종 1)에 『고려사』로 마무리되었다.

『고려사』는 바로 인쇄되지 못하고 1454년(단종 2)에야 인쇄, 반포되었다. 그런데 완성 때 책임을 맡고 있었던 김종서의 이름이 빠지고 정인지의 이름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고려사』의 편찬자로 32명이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 참여한 유성원, 박팽년 등이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김종서를 비롯한 이들은 수양대군(세조)이 정권을 잡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란의 희생자들이었다. 『고려사』의 첫 간행본은 현재 전하지 않고, 이듬해에 간행한 을해자(乙亥字)본, 광해군·중종 때의 목판본, 연대 미상의 판본에 남아 있다. 우리 대학의 소장본도 연대가 분명하지 않다.


『고려사』는 세가 46권, 지 39권, 표 2권, 열전 50권, 목록 2권 등 총 139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편찬 원칙에서 ‘본기(本紀)’는 제후의 격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세가’로 한다고 하였다. 『고려사』는 국왕을 기록한 부분을 세가라 하였고, 신하들에 대한 것은 열전에 기록하였다. 세가의 비율은 34% 정도이며, 열전은 1/3을 넘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열전에는 인물의 성격에 따라 후비(后妃), 충의, 간신, 반역 등으로 나누어 기록했다. 그런데 세가에는 태조 왕건에서 공양왕까지 32명의 국왕에 대한 기록만이 실려 있고, 우왕과 창왕은 신우(辛禑), 신창(辛昌)이라는 이름으로 열전 부분의 반역전에 실려 있다. 『고려사』를 편찬했던 조선시대의 역사가들은, 우왕과 창왕이 신돈(辛旽)의 자손이라 하여 고려의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주장은 이성계 일파가 고려의 멸망과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 건국 세력의 주장과 달리 고려 사람들의 생각은 정반대였다. 우왕이 폐위되어 강화로 쫓겨 갔다는 말을 듣고, 고려말의 유학자 원천석은, “나라에서 선왕(先王)의 아들을 신돈의 아들이라 하여 폐위하고 서인(庶人)으로 만들어 강화도로 내쳤다.”고 기록하였다. 원천석은 우왕, 창왕 부자를 ‘선왕’이라 호칭하며 우왕과 창왕이 공민왕의 자손임을 분명히 했다.


이 책은 유교의 역사인식에 따라 편찬되었다. 정인지의 서문에 따르면 “새 도끼 자루를 다듬을 때에는 헌 도끼 자루를 기준으로 삼으며, 뒷 수레는 앞 수레의 넘어지는 것을 보고 자기의 교훈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대개 지난 시기의 흥망이 장래의 교훈으로 되기 때문에 이 역사서를 편찬하여 올리는 바입니다.”고 하여 유교에 입각한 도덕 사관을 내세웠다. 이 책은 유교사관에 입각했기 때문에 사대명분론을 반영하고 있다. 『삼국사기』가 본기라 한 것에 비해, 『고려사』는 세가로 고쳐 사대명분론에 따랐다. 더구나 고려시대 전반에 대한 인식은 조선의 건국을 합리화하려는 것이었다. 이 점은 우왕과 창왕을 신돈의 자손이라 하여 신우, 신창으로 기록하고 고려말의 기록을 이성계, 이방원 중심으로 기록한 것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편찬자들은 지배자 중심으로 역사를 보고 있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왕과 왕의 정치를 보필하는 신하, 그리고 통치제도로 파악하였다. 국가를 유지하려면 국왕은 좋은 정치를 해야 하는데, 좋은 정치를 하려면 충직하고 현명한 신하를 발탁해야 하고 신하의 충언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논평하였다. 그리고 역사를 문신 중심으로 보아 무신들을 낮게 평가하였다. 이렇게 역사관에 문제가 있긴 하지만 『고려사』는 고려시대에 대한 최고의 정보를 담고 있다. 기본 자료로 고려의 실록을 이용하였고, 그 외에도 광범한 고려의 자료들을 수집하여 참고하였다. 고려 문화의 중심이던 불교·풍수지리설에 대한 자료가 상대적으로 소략하다는 등의 한계가 있지만 유교사관이 가진, ‘있는 그대로 쓴다’는 직서(直書)의 원칙에 충실하여 폐하·태자 등과 같은 천자국 용어를 그대로 기록하였다. 
 김철웅(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김철웅 연구교수
김철웅 연구교수

 kim9963@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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