甲午 ‧ 乙未義兵과 義城義陣
甲午 ‧ 乙未義兵과 義城義陣
  • 권용우<명예교수‧법학>
  • 승인 2013.01.28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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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午 ‧ 乙未義兵과 義城義陣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1894년 6월 21일(양력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景福宮)을 침입하여 조선(朝鮮) 왕실(王室)을 농락한 갑오변란(甲午變亂)이 일어나자 전국에서 의병항쟁(義兵抗爭)이 일어났다. 이 때, 제일 먼저 경상도 안동(安東)에서 의병항쟁이 일어났는데, 그 중심에 공주(公州) 유생 서상철(徐相轍)이 있었다.

   6월 23일(양력 7월 25일), 서상철은 경상도 전역에 일본의 만행을 비방하는 격문(檄文)을 배포하고, 2천여명의 의병을 모아 항쟁에 나섰다. 뒤 이어서, 홍범도(洪範圖)가 철원(鐵原)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다음 해 7월22일(양력 9월 10일)에는 김원교(金元喬)가 평안남도 상원(祥原)에서 봉기하였다.

 

   乙未事變이 다시 義兵抗爭으로 이어져

 

   감오변란이 있은 후, 우리 정부는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 하였다. 이러한 정책의 배후에 명성왕후(明成王后)가 있다고 판단한 일본은 명성왕후의 제거에 나서게 된다. 이러한 일본의 사전계획에 의하여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명성왕후가 일본 공사(公使) 미우라 고오로(三浦梧樓)가 지휘한 일본군에 의해서 시해(弑害)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 사건을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고 하는데, 이로써 반일감정(反日感情)이 격화되어 전국적으로 의병항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더하여, 11월 15일(양력 12월 30일)에 내려진 단발령(斷髮令)은 의병항쟁에 불을 붙였다. 이 때, 단발령은 형식상으로는 왕명(王命)에 의한 것이었으나, 그 배후에 일본측의 압력과 친일내각(親日內閣)의 횡포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 때문에 지방 각처에서 이에 항거하는 의병이 봇물 터지듯 일어났다.

   우리나라에는 머리를 소중히 여기는 전통이 있었으므로, 많은 선비들은 ‘손발은 자를지언정 두발(頭髮)을 자를 수 없다’고 분개하여 정부의 단발령에 반발하면서 의병항쟁으로 이어졌다.

 

   이 때 의병항쟁의 중심은 춘천(春川) ‧ 강릉(江陵) ‧ 홍주(洪州) ‧ 진주(晋州) ‧ 나주(羅州) 등이었는데, 1896년에 접어들면서 그 세(勢)가 전국으로 확산되어갔다. 그 대표적인 것이 춘천(春川)의 이소응(李昭應), 지평(砥平)의 이춘영(李春永) ‧ 안승우(安承禹) ‧ 홍사구(洪思九), 제천(堤川)의 류인석(柳麟錫) ‧ 서상렬(徐相烈) ‧ 이필희(李弼熙), 홍주(洪州)의 김복한(金福漢) ‧ 이 설(李偰) ‧ 안병찬(安炳瓚) 등이었다.

 

   이 때 의병항쟁의 중심에는 척왜론(斥倭論)과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이 자리잡고 있었다. 일본이 개화(開化)를 구실로 침략정책을 강화하고, 강압적인 내정개혁(內政改革)을 통해 우리나라의 고유가치(固有價値)를 훼멸함으로써 이에 민족존망(民族存亡)의 위기를 느낀 보수유림들이 항일(抗日)의 기치를 든 것이다. 이에 더하여, 일본세력에 종속한 친일파(親日派)도 의병들의 투쟁대상이었다.

   그리고, 의병들의 주요 공격목표는 일본군 수비대(守備隊)였다. 일본은 군용전신선(軍用電信線)을 보호하기 위하여 전국 각처에 수비대를 설치하고 있었는데, 의병들은 이 전선을 절단하여 일본군의 연락망을 끊고 일본의 세력을 몰아내려는 목적이었다.

 

   義城義陣이 倡義되다

   이러한 의병항쟁의 확산은 경북지역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1895년 12월 3일(양력 1896년 1월 17일) 안동(安東)을 시작으로 하여 예안(禮安) ‧ 청송(靑松) ‧ 영덕(盈德) ‧ 봉화(奉化) ‧ 풍기(豊基) ‧ 상주(尙州) ‧ 의성(義城)으로 이어졌다.

   이 때 경북지역의 의병항쟁은 유림(儒林)의 기반이 강한 지역에서 시작되었는데, 의성의 경우에도 유림이 중심이 되어 의성향교(義城鄕校)에서 창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896년 2월 12일(양력 3월 25일), 김상종(金象鍾)을 의병장으로 추대하면서 의성의진(義城義陣)이 창의되었다. 그 중심에 이돈유(李敦裕) ‧ 신상헌(申相憲) ‧ 김익상(金翊相) ‧ 구증희(具曾喜)가 있었다. 이들은 의성 ‧ 안동에 지역기반을 가진 유림들로서, 의성의진의 창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의병장으로 추대된 김상종은 “의리상 이 막중한 일을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기도 어렵고, 또 사태가 너무나 급박하므로 의장(義將)이라는 대임을 수락한다”고 하면서, 의병장으로 취임하였다(안동문화연구소 편 『경북독립운동사 Ⅰ』 중에서).

   “성상(聖上)께서 머리를 깍는 일로 누차 흉도(兇徒)에게 핍박을 당하니 생각한즉 목이 막히고, 국모(國母)가 해를 입어 마침내 허위(虛位)로 돌아감에 말하자니 통곡스럽다. 사나운 위세로 협박함이 어미를 잡아먹는 짐승과 같고, 예의를 무시하여 버리니 무도한 견양(犬羊)이로다”. 이는 김상종이 의병장에 오르면서 전국에 보낸 격문의 일부이다. 나라가 무너지는 안타깝고 절박함을 읽을 수 있다.

 

   이 때, 의성의진의 진용은 중군장 권대직(權大稷) ‧ 선봉장 김수담(金壽聃) ‧ 우익장 이희정(李羲貞) ‧ 소모장 김수욱(金壽旭) ‧ 관향장 김수협(金壽莢)이었으며, 권휘연(權徽淵) ‧ 서상부(徐相孚) ‧ 김회종(金會鍾) ‧ 김호직(金浩直)도 주요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병장 김상종은 의성군 점곡면(點谷面) 서변리(西邊里) 사촌(沙村)에서 진사(進士) 김수익(金壽翼)의 2남으로 태어났으며,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문하에서 수학한 보수적 유림이다. 그리고, 그와 생사(生死)를 같이 한 의진의 진용들도 모두 의성지역에 기반을 둔 유림의 자제들로서 서로 학문적 ‧ 혈연적 관련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의성의진은 창의한 지 7일째가 되는 2월 19일(양력 4월 1일) 의성읍 구봉산(九峰山, 당시의 九成山)에서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는데, 이것이 ‘구봉산전투’이다(『義城邑誌』 중에서). 구봉산전투는 의성의진이 결성되고 훈련을 제대로 할 겨를도 없이 치러진 전투였다. 그러나, 의병장 김상종이 진두에 서서 부장들을 이끌었으며, 군 ‧ 관 ‧ 민이 하나가 되어 죽기를 무릅쓰고 전투에 임했다고 한다.

   그런데, 의성의진은 뒤 이은 3월 28일(양력 5월 10일)의 황산(黃山, 옥산면 입암리)전투에서 대패하면서 많은 군사를 잃고 만다. 의성의진은 새로은 방략을 모색하기 위하여 남은 군사를 이끌고 청송(靑松)으로 들어가 청송의진(靑松義陣) ‧ 이천의진(利川義陣)과 연합하여 ‘의성연합의진’을 결성하게 된다. 4월 2일(양력 5월 14일), 연합의진은 감은리(甘隱里, 청송군 안덕면 감은리)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으나, 뒤 이은 비봉산(飛鳳山)전투에서 크게 패하게 되었다.

   이 때 김상종의 휘하에서 중군을 역임한 이필곤(李苾坤)이 김상종의 뒤를 이어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이필곤은 그 때의 나이가 33세였는데(義城文化院 편 『抗日獨立運動 義城郡資料集』 중에서), 의성군 사곡면(舍谷面) 오상리(梧上里) 출신이다.

   이 때, 이필곤 의병장이 이끈 의성의진의 활동상이 어떠하였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으나, 의병진을 해산하라는 국왕의 조칙(詔勅)이 각처로 내려왔을 무렵 의성군수에게 총기를 반납하고 해산된 것으로 보인다.

권용우<명예교수‧법학>
권용우<명예교수‧법학>

 dknew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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