離散의 아픔을 누가 어루만져주나?
離散의 아픔을 누가 어루만져주나?
  •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 승인 2013.07.08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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離散의 아픔을 누가 어루만져주나?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오는 27일이면 6 ‧ 25전쟁 휴전협정(休戰協定) 60주년이 되는 날이다. 6 ‧ 25전쟁이 발발한지 3년1개월만에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전쟁은 정전(停戰)으로 끝을 맺게 되었다. 이로써 국토는 휴전선(休戰線)으로 분단된 채 군사분계선(軍事分界線)과 비무장지대(非武裝地帶)가 설정되고, 남북(南北)은 오고 갈 수 없는 아픔을 안고 가슴 조이는 사이에 60년의 세월이 덧없이 흘러갔다.

  
     6 ‧ 25 戰爭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피를 나눈 동족(同族)끼리 총부리를 겨눈 6 ‧ 25전쟁은 우리 민족에게는 너무나 큰 비극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北韓) 괴뢰집단(傀儡集團)의 불법남침(不法南侵)으로 시작된 6 ‧ 25전쟁은 밀고 밀리는 3년1개월에 걸쳐 전국토(全國土)가 초토화되었고, 온 산야(山野)는 피로 물들었다.

     어디 그 뿐이었던가. 피아(彼我)간 인적 ‧ 물적 손실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대한적십자사의 『離散家族白書(1976년)』에 의하면,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한국군 사망 149,005명, 부상 717,083명, 실종 132,256명이었다. 이 외에도 남한의 민간인 손실은, 사망 244,633명, 학살 당한 사람이 128,935명, 이북으로 납북된 사람이 84,532명이었으며, 실종자는 무려 303,212명이었다. 북한의 인적 손실은 3백만명 이상이었는데, 당시 북한의 인구가 1천만명 정도였음에 비추어 볼 때 그 손실은 엄청난 것이었다.

     전쟁의 피해는 이 뿐이 아니었다. 우리 남한의 재산손실은 무려 20억 달러였다. 이 액수는 1949년 남한의 국민총생산액(GNP)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6 ‧ 25전쟁이 남긴 인적 ‧ 물적 손실이 이처럼 어마어마한 것이었지만, 그보다 더 큰 상처는 민족분단(民族分斷)의 고착화와 남북간 불신(不信)의 골을 더욱 깊게 했다는 데 있다.

     이에 더하여, 전쟁이 할퀴고 간 한반도(韓半島)에 남북으로 갈라진 1천만 이산가족(離散家族)의 아픔은 우리 민족에게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離散家族, 이들에겐 이제 時間이 없다

  
     이산가족의 아픔은 그들만의 아픔이 아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아픔이다. 그리고, 그 아픔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우리는 이산가족의 아픔을 생각할 때면, 1983년 KBS가 펼쳤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생방송을 떠올리게 된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6 ‧ 25전쟁 33주년을 맞아 ‘광복과 6 ‧ 25전쟁으로 헤여진 이산가족을 찾아주기 위해서’ 그 해 6월 30일 밤 10시15분부터 11월 14일까지 138일간 생방송으로 진행된 ‘휴먼 드라마’였다. 10만여명의 이산가족이 참여하여, 그 중 10,189명이 재회의 기쁨을 누렸다(조선일보 2013. 6. 28). ‘뜨거운 혈육상봉(血肉相逢)의 감격’이었다. 그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웃었다. 웃고, 또 울었다. 서로 부둥켜 안고, 뒹굴었다. 온 나라가 울음바다로 변하지 않았던가. 서울에서도, 부산에서도, 제주도에서도 ‧ ‧ ‧.

  
     아직도 30년 전 그 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메인다. 헤어진 가족을 찾는 이들이 붙여놓은 갖가지 사연들! “꼭! 꼭! 꼭! 우리 엄마를 찾아주세요. 우리 엄마 어릴 때 얼굴은 나하고 똑 같답니다. ‧ ‧ ‧” “엄마 아빠 오빠 피난길에 헤여진 것 같음. 아빠는 목사님이셨던 같음”. 이 얼마나 절절했던가.

     지난 6일에 방연된 KBS 1TV ‘다큐 극장’ - ‘그때, 대한민국이 울었다’는 30년 전 그 때의 모습을 재현하면서 또 한 번 이산(離散)의 슬픔을 되새기게 했다.

     여의도공원에 모인 이산가족은 모두 내 형제요, 내 이웃이었다. 이산의 아픔과 만남의 기쁨이 어우러져 감격의 눈물을 쏟아냈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그 장면! “김씨가 아니야, 너는 허씨야!”라고 울부짖던 허현철 ‧ 현옥 남매의 혈육상봉은 또 한 번 온 국민을 울게 만들었다. 전쟁고아(戰爭孤兒)였던 그 남매의 극적인 상봉, 참으로 감격스러웠다.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 -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 그리웠던 삼십년 세월 / ‧ ‧ ‧ 어머님, 아버님, 그 어디에 계십니까 / 목 메이게 불러봅니다”를 떠올리면서 ‘전쟁이 남긴 상처가 어찌도 이렇게 질기고 길단 말인가’를 되내이게 했다.

  
     가족의 생사(生死)를 모르는 채 밤낮 북쪽 하늘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안부를 걱정하는 이산가족들의 아픔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1985년을 시작으로 몇 차례의 이산가족 상봉과 몇 차례의 화상상봉(畵像相逢)이 있었지만, 아직도 그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다시 만날 그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게는 이제 시간이 없다.

  
     이산가족 정보통합시스탬에 등록된 숫자가 12만8천여명이었는데, 현재는 7만3천여명만이 생존하고 있다고 한다(대한적십자사 소식지「Redcross」 2013년 여름호). 그리고, 이에 따르면 가족의 생사조차 모르고 돌아가시는 이산가족이 하루에 10여명이라고 하니, 이제 이들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남북관계는 경색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08년 7월 금강산 지역에 문을 연 ‘이산가족면회소’는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으로 현재 방치된 상태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금년 2월,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면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통한 남북관계의 정상화’를 주요 대북정책(對北政策)으로 내세우고, 남북간 호혜적 경제협력 및 사회문화 교류 업그레이드, 서울과 평양에 남북교류협력사무소 설치 등의 실천방안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우리 정부의 진정성을 외면한 채 정전협정 폐기를 선언하고, 개성공단 잠정 폐쇠라는 악수를 두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우리 측은 ‘당국자간 대화’의 창을 열어놓고 있지만, 대화의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는 7만3천여명의 이산가족들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하루 빨리 남북관계가 개선되어 애타게 그리던 가족들을 만날 수 있는 그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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