祖國光復을 노래한 抵抗詩人, 李陸史
祖國光復을 노래한 抵抗詩人, 李陸史
  • 권용우
  • 승인 2014.04.09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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祖國光復을 노래한 抵抗詩人, 李陸史

권     용     우
 <명예교수 법학>


   오는 5월 18일은  이육사(李陸史)가 태어난 날이다. 그는 1904년 5월 18일(음력 4월 4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도산면(陶山面) 원촌동(遠村洞) 881번지에서 태어나, 16세까지 이 곳에서 할아버지로부터 한학(漢學)을 배우면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육사가 어린시절을 보낸 원촌동은 건지산(蹇芝山)을 주산(主山)으로 하는 남향(南向) 마을로서, 진성이씨(眞城李氏)의 집성촌(集姓村)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洛東江)의 맑고 푸른 강물을 벗하면서 내일의 꿈을 키워갔다.
   말하자면, 이곳 원촌동은 육사의 ‘꿈의 둥지’요, ‘그리움의 터전’이었다. 그래서, 그는 조국광복(祖國光復)의 꿈을 안고 일본, 중국 등의 이역(異域)을 떠돌면서도 언제나 이곳을 그리워했다.
   1939년에 발표한 시(詩) ‘연보’(年譜)에 “「너는 돌다리목에서 줘왔다」던 / 할머니 핀잔이 참이라고 하자 / 나는 진정 강 언덕 그 마을에 / 버려진 문바지였는지 몰라? / 그러기에 열여덟 새봄은 / 버들피리 곡조에 불어 보내고”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육사는 이렇게 노래하면서 마을 앞을 흐르는 푸른 강물과 넓게 뻗어간 산줄기를,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머리에 떠올렸으리라.

   그리움의 터전, 고향을 노래하다

   육사의 본명은 원록(源祿)이며, 형 원기(源祺)와 동생 원유(源裕) ? 원지(源祉) ? 원우(源祐) ? 원룡(源龍) 등 6형제의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호(雅號)인 육사(陸史)는 1927년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朝鮮銀行)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붙여졌던 수인번호(囚人番號) ‘264’에서 취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22세때인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한다. 그의 맏형인 원기와 바로 아랫동생인  원유와 함께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자기의 일신(一身)을 맡겼다. 의열단은 1919년 3 ? 1 운동 후 그 해 11월에 만주의 길림성(吉林省)에서 조직되었는데, 구국투쟁으로서 이름을 떨쳤던 독립운동단체였다.
   육사는 독립운동을 위해서 자신부터 힘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으로 1926년에는 북경(北京)으로 건너가서 조선군사간부학교에 입교하여 군사훈련을 수련하기도 하였다. 그 후, 북경대학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공부하면서, 만주와 중국의 여러 곳을 오가며 정의부(正義府) ? 군정부(軍政府) 등의 독립단체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한편, 중국의 근대문학의 거장(巨匠) 노신(魯迅 : 1881~1936)과 교유하면서 독립운동을 계속 이어갔는데, 이 때 만주로 옮겨가서 외숙 허 규(許珪)의 독립자금 모금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육사는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는 한편 시인으로서 필명을 날리기도 하였다. 1933년 만주에서 귀국하여 ‘육사’(陸史)라는 필명으로 「신조선」(新朝鮮)에 시 ‘춘수삼제’(春愁三題) ? ‘황혼’(黃昏) ? ‘실제’(失題) 등을 발표하면서 시단(詩壇)에  등단하였다. 그리고, 1935~36년에는 더욱 활발한 문학활동을 펼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에는  시 이외에도 수필 ? 소설 ? 논문 ? 시나리오 등을 발표하였으며, 노신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 「조광」(朝光)에 발표하였다.
  그리고, 1937년에는 신석초(申石艸) ? 윤곤강(尹崑崗) ? 김광균(金光均) 등과 함께 동인지(同人誌) 「자오선」(子午線)을 창간, 그 해 12월에 ‘노정기’(路程記)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 무렵 그 유명한 ‘청포도’(靑葡萄)를 비롯하여 ‘교목’(喬木) ? ‘절정’(絶頂) ? ‘파초’(芭蕉) 등의 서정(抒情)이 넘치는 시를 발표하면서 필명을 날렸다.

   “내 고장 칠월(七月)은
    청포도(靑葡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려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는 육사가 1939년 「문장」(文章)에 발표한 ‘청포도’의 전문이다. 이 시는 일제강점기에 작가의 고향 마을을 그리워하는 애뜻한 심정과 나라를 빼앗긴 암울한 민족의 현실을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밝은 내일(조국의 독립)을 기다리는 작가의 마음을 올올이 담고 있다.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고,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오는 손님’ - 조국의 독립 - 을 기다리는 작가의 마음이 나의 가슴을 적신다.

   曠野, 祖國의 光復을 노래하다

  육사는 1943년 초 독립운동을 위해 북경으로 갔다가 그 해 4월 귀국하였는데, 6월에 일경(日警)에 피검되어 동대문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북경으로 압송되어 그 곳 형무소에 수감 중 순국(殉國)하였다. 그 때가 1944년 1월 16일이었다.
  육사의 40년 짧은 삶은 그 자체가 오로지 빼앗긴 조국의 독립(광복)을 위한 험난한 고난의 길이었다. 그는 전(全) 생애를 통해서 17회나 투옥되었으며,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광야(曠野)에서 보듯이 민족의 비운(悲運)을 애뜻하게 노래하고 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광야! 이는 육사가 자기의 희생을 통해서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는 간절한 바람을 암시하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이 시를 통해서 ‘조국의 독립(광복)’이라는 확신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지 않는가.
   이육사(李陸史)! 그는 시인이기에 앞서 조국의 독립(광복)을 위하여 전 생애를 바친 독립운동가이었다. 두 손 모아 그의 명복(冥福)을 빈다.

권용우
권용우

 lawkwo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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