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障碍人의 날’을 생각한다
또 ‘障碍人의 날’을 생각한다
  • 권용우
  • 승인 2014.04.24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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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障碍人의 날’을 생각한다

 

권용우

(명예교수 ․ 법학)

 

지난 20일은 ‘장애인의 날’이었다. 1972년부터 민간단체가 4월 20일을 ‘재활의 날’로 정하고 장애인의 재활의지를 다져왔는데, 정부가 이를 이어받아서 1981년부터 ‘장애인의 날’로 정하고 기념행사를 해왔다. 그리고, 1989년 12월 개정된 장애인복지법에 의거 1991년부터 ‘장애인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지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기창 교장을 떠올린다.

 

필자는 장애인의 날을 맞을 때면 언제나 김기창 교장을 떠올린다. 때는 1979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2부대학 행정학과 1학년 법학통론 강의를 위해서 강의실에 도착해서 출석점검을 하던 중 시각장애인 학생과 조우하게 되었는데, 그 학생이 김기창이었다. 그런데, 4월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중간고사 시간표가 발표되고, 법학통론 시험일이 다가왔다. 필자는 시각장애인인 김기창 학생에게 “김 군은 필기시험을 치를 수 없으니 리포트로 대체하겠다”고 했더니, 그 학생은 “아닙니다. 저도 시험을 볼 수 있습니다”라는 예상 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1979학년도 1학기에는 법학통론, 2학기에는 민법총칙 강의가 있었는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때에는 2부대학 교학과장실에서 별도로 시험을 보게 편의를 제공하였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김 군의 답안은 아주 우수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긍정적인 자세로 대학생활을 즐겼고, 그리고 공부에 열심이었다.

 

그는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특수교육학으로 전공을 변경하여 대학원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그리고, 2004년 8월 하순 몹시 무덥던 여름날 그는 박사학위 까운을 입고 늠름한 모습으로 졸업식장으로 입장했다. 필자와는 전공은 다르지만 필자에게 학부에서 두 강좌를 수강하면서 1년간을 함께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 때, 시각장애를 딛고 열심히 공부하던 김기창 학생의 진지한 모습이 오버랲되었다.

김 군이 1979년 대학을 입학할 때는 서울맹학교 고등부를 졸업하고, 그의 모교에 교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였다고 한다. 그는 시각장애를 딛고 교사직에 있으면서 어려운 석사 ․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영광스러운 박사학위를 영득하였다. 박사학위증을 받아 든 그는 얼마나 가슴이 울렁거렸을까?

 

김 군은 그 후에 서울맹학교 교감을 거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학교의 발전에 헌신했다. 그런 그가 2013년 10월 1일에 서울맹학교 개교 100주년을 맞았다. 그의 주변에서는 38년간 봉직한 김기창 교장을 ‘서울맹학교의 산증인’으로 칭송했다. “아홉 살이던 1955년에 이 학교에 입학해서 초등 ․ 중등 ․ 고등부를 졸업하고, 1970년 3월부터 교사로 부임해서 후배들에게 애정을 쏟았다.” 김 교장의 말이다. 그는 시각장애를 딛고 1995년에 교감으로, 그리고 99년에는 교장으로 임명되어 2007년까지 8년간 재임했다.

그는 서울맹학교에서 학생으로, 교사로, 교감으로, 교장으로 58년간을 살아온 진정한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다. 김기창 교장과의 귀한 인연을 생각하면서 흘러간 지난 날을 되돌아보니 참으로 감회가 새롭다.

 

苦難을 딛고 일어서다

 

필자와 김기창 교장과의 인연은 그 후에도 계속 이어져왔다.

2003년 10월 1일, 서울맹학교 개교 90주년 기념행사의 자리였다. 김 교장의 부탁을 받고, 필자가 내빈의 한 사람으로서 ‘축사’를 하게 되는 기회가 있었는데, 여기에 그 일부를 옮겨보면서 ‘장애인의 날’의 의미를 생각한다.

 

“1913년 10월 1일, ‘시각장애인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되고자 문을 연 이래, 험난한 역사의 첩령(疊嶺)을 넘어, 교육백년지대계(敎育百年之大計)를 향한 찬연히 빛나는 90여 성상(星霜)을 쌓아올린 국립 서울맹학교야말로 우리나라 교육계의 큰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친애하는 내외귀빈, 동문, 그리고 재학생 여러분! ‘뜻이 있는 자는 반드시 성취한다’는 옛말이 있듯이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의지’(意志)가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자기가 가야 할 목표를 설정하고, 꼭 이루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맨몸으로도 태산준령(泰山峻嶺)을 넘을 수 있고, 망망대해(茫茫大海)도 건널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장애를 극복하고 세계마라톤계의 톱클라스로 우뚝 선 한 여자 마라토너의 삶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올해로 서른네살인 그녀의 이름은 「말라 러니언」(미국)입니다. 그녀는 아홉 살 때, 퇴행성 망막질환을 앓아 열네 살에 시력을 거의 다 잃었습니다. 흐릿하지만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는 거리도 3,4m에 불과한 그녀가 미국의 5,000m 실내 최고기록(15분07초33)을 작성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그런 「러니언」을 보며 ‘신(神)의 은총이 내린 기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러니언」의 그러한 기록은 결코 우연도, 신의 은총도 아니었습니다. 자기 앞에 놓여진 고난과 역경을 극복해내려는 그녀의 의지와 노력이 오늘의 그녀를 만든 것입니다.

그녀는 운동장에서 수도 없이 넘어지고, 엎어지며 무수한 피눈물을 흘러야 했습니다. 그런 불굴의 의지와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그녀는 미국 여자육상의 최고스타가 되었고,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습니다.

그녀가 올림픽 출전권을 따내고, 맨 먼저 달려간 곳은 바로 매사추세츠주 보스톤(Boston)에 있는 퍼킨스 스쿨(Perkins School for the Blind)이었습니다. 그 곳에는 그녀처럼 앞을 보지 못하는 2백여명의 학생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학생들 앞에 서서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용기와 희망을 잃지 말라’며, 학생들을 격려했습니다. 퍼킨스 스쿨은 미국 최초의 시각장애인 학교이자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기적의 아이’ 「헬렌 켈러」가 공부한 곳이기도 합니다.

… 인간승리의 무한질주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말라 러니언」이 시각장애를 극복하고 세계적인 마라토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불굴의 의지와 피눈물나는 노력의 결과입니다.”

 

‘장애인의 날’을 보내면서 장애를 극복하고 세계적인 마라토너로 성장한「말라 러니언」을 또 떠올려본다. 그렇다. 장애인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고 자립정신을 키워가야 한다. 그리고. 주변의 편견을 이겨내야 한다. 그러나, 그들만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장벽은 너무 높다. 우리가 그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보내야 한다.

우리 모두가 그들의 힘이 되어주자. 그리고, 그들이 한 인간으로서 보람 있는 삶을 누리면서 우리의 이웃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하자.

권용우
권용우

 lawkwo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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