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農 金嘉鎭, 大同團을 이끌다
東農 金嘉鎭, 大同團을 이끌다
  • 권용우
  • 승인 2014.05.13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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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農 金嘉鎭, 大同團을 이끌다

 

권용우

(명예교수 ․ 법학)

 

1919년 5월 20일, 이 날은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을 조직하고, 이를 대외(對外)에 선포한 날이다.

“우리 조선민족은 2천만 성충(誠忠)과 묵계(黙契)의 발동에 따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에 의지(倚)하여 인류대동의 새로운 요구에 응하려 하며 세계평화의 대원칙을 준수하고 정의 ․ 인도의 영원한 기초를 확립하기 위해 앞서 조선 독립을 선포했다. … 우리 민족은 민족적 정신의 자각을 진중히 가지며 생존상 기능의 자신(自信)을 발휘하여 엄격한 주장을 관철할 것이다. … 모든 우리 민족 일치의 동작으로써 10대 사회 각 단체와 지방구역이 선출한 인원을 통일 ․ 종합시키기 위해서 본단을 조성하고 우리 민족 영세(永世)의 귀추인 3대 강령을 내세워 이를 세계에 선언하는 바이다.”

 

이는 조선민족대동단 선언서(宣言書)의 일부이다. 그리고, 이 선언서에는 다음과 같은 ‘3대 강령(綱領)’이 있었다.

(1) 조선 영원의 독립을 완성할 것

(2) 세계 영원의 평화를 확보할 것

(3) 사회의 자유 발전을 널리 광박(廣博)할 것

 

조선민족대동단 ‘3대 강령’에는 독립 ․ 평화 ․ 자유를 갈구하는 우리 민족의 염원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결의’에는 일본이 우리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포학을 계속한다면 우리는 부득이 최후의 수단을 쓸 것도 잊지 않고 있었다.

 

民族의 獨立을 위한 秘密團體, 大同團

 

조선민족대동단은 대동주의(大同主義)에 입각하여 민족의 정신통일과 실력양성에 의한 민족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 조직된 비밀단체이다. 대동단은 관료 ․ 유림 ․ 군인 ․ 교사 ․ 승려 ․ 상인 ․ 노동자 ․ 보부상 ․ 학생 등의 다양한 인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3 ․ 1 독립운동 이후 지사(志士) 중심의 민족운동으로 흐르고 있는 운동행태와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여기, ‘대동’(大同)이란 전국을 망라한 각계의 유력인사를 포섭하여 조직을 확대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독립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이상사회(理想社會)를 건설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3 ․ 1 운동이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지만 통일된 지휘체계가 없고 여러 분파로 나뉘어서 진전됨에 따라 그 효과를 극대화하지 못하였음에서 얻은 교훈이었다.

 

그리고, 대동단을 조직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전 협(全協, 본명 全國煥) ․ 최익환(崔益煥) ․ 정남용(鄭南用) ․ 이기연(李起淵) ․ 이내수(李來修) ․ 최전원(崔銓元) 등이었다. 전 협은 단장을 맡아서 단을 통활하면서 단원 모집에 힘썼으며, 종교단 총대(總代)에 정남용, 유림단 총대에 이기연과 김내수, 상인단 총대에 양 정(楊禎), 청년단 총대에 나창헌(羅昌憲), 군인단 총대에 유경근(劉景根), 노인단 총대에 김상열(金相說), 부인단 총대에 이신애(李信愛)가 각각 선출되었다.

대동단은 비밀단체이므로 단원 모집에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초기 단원들은 각자의 인맥을 통해 믿을만한 사람을 단원으로 가입시켰는데, 전 협이 양 정 ․ 이재호(李在浩) ․ 윤용주(尹龍周) ․ 이달하(李達河) ․ 김찬규(金燦奎) ․ 서병규(徐丙圭) ․ 이병재(李秉宰) ․ 김 규(金奎) ․ 이기현(李基鉉)을, 최익환이 동창율(董昌律) ․ 이능우(李能雨) ․ 김영철(金永喆)을, 정남용이 나창헌 ․ 송세호(宋世浩) ․ 이건호(李建浩) ․ 박형남(朴馨南) ․ 한기동(韓基東)을 가입시켰다. 그리고, 그 후에 윤용주를 통해 이일영(李一榮)이, 이능우를 통해 나경섭(羅景燮)이 단원으로 가입하였다.

東農, 朝鮮民族大同團 總裁가 되다

 

이처럼 초기 단원의 노력에 의하여 믿을만한 단원들을 포섭하였으므로, 이들은 단체의 이름을 ‘조선민족대동단’으로 정하고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그런데,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조직을 정비하였으나, 남은 문제가 하나 있었다. 대동단의 상징인 총재를 누구로 추대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총재로서의 인물됨은 학문과 덕망을 갖추고 국민적 신망을 가진 자이어야 했다. 전 협 ․ 최익환 ․ 정남용 등이 여러 사람을 후보군으로 올려놓고, 협의를 거쳐서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을 지낸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을 추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때, 동농은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가 있은 후 체부동(體府洞) 자택에 칩거하면서 전직 대신으로서 비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단장인 전 협은 좌우를 살필 겨를 없이 칩거 중인 동농을 방문하여 총재의 추대를 제안하고, 설득하였다. 이로써 동농 김가진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의 대신 출신으로서 74세의 고령에 조선민족대동단의 총재로 추대되어, 제2의 독립운동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동농 김가진! 그는 1846년 2월 25일 안동김씨(安東金氏) 집안의 2남으로 태어나 가숙(家塾)에서 한학(漢學)을 배우면서 유년시절을 서울에서 보냈다. 그러던 중 그가 8세 되던 1853년 아버지 김응균(金應均)이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부임하게 됨으로 어머니와 함께 안동으로 거처를 옮겨 생활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는 문필(文筆)이 출중하였지만, 서출(庶出)의 신분이었으므로 과거(科擧)에 나갈 수가 없었다. 그가 18,9세가 되었을 때 이러한 사실로 말미암아 크게 좌절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1877년 11월 32세 때 규장각(奎章閣) 검서관(檢書官)이 되었는데, 그 당시 검서관은 서출의 신분이더라도 등용될 수 있는 직책이었다. 그리고,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이후 적서(嫡庶)의 차별이 타파됨으로써 1886년 41세 때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게 되었고, 그 때부터 벼슬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그는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895년에는 농상공부 대신에 오르고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으나, 1910년 8월 29일 일본에 의하여 나라가 병탄(倂呑)됨으로써 모든 꿈을 접어야만 했다.

 

그러나, 세상만사(世上萬事)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던가. 대동단의 총재에 추대됨으로써 동농에게 있어서는 경술국치와 더불어 일본으로부터 받은 남작(男爵)이란 수치스러운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게 되었다(정정화 「長江日記」).

1919년 10월 10일, 동농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누더기를 걸치고 아들 김의환(金毅煥)을 앞세우고 상해(上海)로 망명, 대동단 활동의 폭을 해외(海外)로 넓혀나갔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安昌浩)와 손잡고 망명의 길에 올랐으며, 망명 후 임시정부의 고문으로도 활동하였다. 그리고, 의친왕(義親王) 이 강(李堈)을 상해로 망명케 하여 임시정부에 참여케 함으로써 외교적 효과를 노렸지만, 그 해 11월 의친왕 일행이 만주의 안동현(安東縣)에서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를 ‘대동단(大同團)사건’이라고 하는데, 이 사건에 연루된 간부가 다수 체포되었음은 물론이다.

동농은 1920년 3월 대동단 상해본부를 설치하고, 총재로서 포고문, 공고문 등을 배포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는 1922년 7월 4일 조국의 광복(光復)을 보지 못한 채 향년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바람 앞에 꺼져가는 조국(祖國)을 구하고자 노심초사한 애국지사 동농, 그는 오늘도 이국(異國) 땅 차디찬 지하에서 조국을 그리워하리라. 부디 천상(天上)에서 평안을 누리소서!

권용우
권용우

 lawkwo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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