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龍雲, 佛敎改革에 앞장서다

권용우l승인2014.06.26l0호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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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龍雲, 佛敎改革에 앞장서다  

 

권용우

(명예교수 법학)

 

 

1944629(음력 59). 이 날은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선사(禪師)가 서울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서 입적(入寂)한 날이다. 올해로 그가 가신 지 70년이 된다.

한용운은 3 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우리나라 불교계(佛敎界)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그리고, 그는 3 1 독립선언서의 공약3(公約三章)을 쓴 사람이기도 한다.

 

 

民族代表 33중의 한 사람

 

 

한용운이 독립선언서 끝부분에 덧붙인 공약3은 독립운동의 행동강령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언제 보아도 힘이 넘치고 애국혼(愛國魂)이 깃들여 있음을 느낀다.

 

 

“1. 금일 오인(吾人)의 차거(此擧)는 정의(正義) 인도(人道) 생존(生存) 존영(尊榮)을 위하는 민족적 요구이니, 오직 자유적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일주(逸走)하지 말라.

2. 최후의 일인(一人)까지, 최후의 일각(一刻)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

3. .”

 

 

이는 공약3장의 일부이다. ‘최후의 일인까지, 초후의의 일각까지’, 이 얼마나 결의에 찬 부르짖음인가. 이는 만해의 독립투사로서의 진면목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만해는 3 1 운동의 민족대표들과 함께 내란죄(內亂罪)의 죄목으로 서대문(西大門) 감옥에 투옥되어 갖은 고문에 시달리면서 재판을 기다렸다. 서대문 감옥에는 별도의 고문방이라는 것이 있어서, 만해는 다른 민족대표들과 마찬가지로 이 방에 끌러가서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만해는 감옥에 있으면서, 자기를 위해서 변호사를 대지 말것, 사식(私食)을 들이지 말 것, 보석(保釋)을 요구하지 말 것을 제시하고 이를 실천하였다. 그는 또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 정동분실에서 있은 결심공판에서 판사가 최후의 발언을 하라고 하자, “나는 나의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라는 짧막한 답변으로 그의 소신을 피력하였다고 한다.

그의 기개(氣槪)는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 검사장 앞에서 작성한 조선독립이유서(朝鮮獨立理由書)에 잘 나타나 있다. 원고지 53장의 이 이유서는 만해의 확고한 신념에 바탕을 둔 조선독립(朝鮮獨立)의 당위성을 역설한 것으로서, 최남선(崔南善)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능가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조지훈 민족주의자 한용운”).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로 시작한 이 이유서에서 지난 일은 그렇다 하고라도 앞 일을 위하여 간언하노라. 지금은 평화의 일념이 가히 세계를 상서롭게 하려는 때이니 일본은 모름지기 노력할 것이로다로 맺고 있다. 이 얼마나 통쾌한 꾸짖음인가.

 

 

朝鮮佛敎維新論을 펴내다

 

 

만해 한용운. 그는 1879829(음력 712) 충청남도 홍성군(洪城郡)에서 태어나 유년시절 이 곳에서 한학(漢學)을 배우면서 자랐다. 속명은 유천(裕天)이었으며, 용운(龍雲)이 법명이며 만해(萬海)는 법호이다.

그런데, 이 무렵은 우리나라에 서구세력(西歐勢力)이 몰려들면서 통상(通商)을 요구하고, 서구문물(西歐文物)이 유입되기 시작할 때였다. 198410,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의 개화당(開化黨)에 의한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말미암아 국내의 정세가 소용돌이쳤다. 18941월에는 고부군수(高阜郡守) 조병갑(趙秉甲)의 학정(虐政)에 항거하여 동학혁명(東學革命)이 일어났으며, 7월에는 일본군이 경복궁(景福宮)을 침입하는 갑오변란(甲午變亂)이 일어나 민심(民心)이 어수선하였다. 이에 이어서, 그 이듬해 10월에는 일본 공사(公使) 미우라 고오로(三浦梧樓)가 주도하여 명성왕후(明成王后)를 살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자, 이로써 반일감정(反日感情)이 격화되어 전국 각지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나 항일항쟁(抗日抗爭)을 펼쳤다.

만해는 기울어져 가는 국운(國運)을 지켜보면서 더 이상 시골에 묻혀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된다. 그 길로 홀연히 집을 나와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오대산(五臺山) 월정사(月精寺)에서 탁발승(托鉢僧)이 되어 불도(佛道)를 닦기 시작하였다. 그 때가 1896, 만해의 나이 18세 때였다.

 

 

그 후로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세상의 많은 것을 깨닫고, 19051월 설악산 백담사(白潭寺)에 들어가 연곡선사(連谷禪師)를 은사로 모시고 출가(出家)하면서 수도(修道)의 길에 들었다. 이로써 만해는 가정을 버리고, 속세를 등졌다.

1910, 당시 불교계의 모순을 개탄하면서 불교의 개혁을 위한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을 탈고하여, 1913년 회동서관(滙東書館)에서 간행하였다. 불교유신론은 만해가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몸소 겪으면서 그의 참담한 심정을 억누르며 집필하였는데, 이는 조선 불교의 장래를 설계한 명논설(名論說)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장부터 제4장까지는 만해의 불교사상(佛敎思想)을 담고 있으며, 5장 이하는 그의 불교사상을 토대로 하여 조선 불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승려의 교육 참선 염불당의 폐지 포교 사원의 위치 불가에서 숭배하는 불상과 그림 불가의 각종 의식 승려의 결혼문제 주지의 선거방법 승려의 단결 사원의 통할 등을 담고 있다.

만해는 제1장 서론에서 학술 정치 종교 등 각 방면에 유신(維新)을 부르짖는 소리가 천하에 가득한 데, “유독 조선의 불교에 있어서는 유신의 소리가 조금도 들리지 않으니, 모르겠구나, 과연 무슨 징조일까. 조선 불교는 유신할 것이 없는 탓일까,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 그러나 이것 역시 알 수 있는 일이다. 어디까지나 책임은 나에게 있을 것임에 틀림 없다고 하면서, “유신론을 써서 스스로 경계하는 동시에 이를 승려 형제들에게 알리는 터라고 적고 있다.

 

 

이 밖에도, 만해는 경전(經典)을 간행하여 불교의 대중화에 노력하였다. 그는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지 1600여년이 되었음에도 이렇다 할 불교대전(佛敎大典)이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1912년부터 불교대전편찬에 착수하였다. 이를 위하여 경남 해인사(海印寺) 장경각(藏經閣)에 비치되어 있는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 6,85981,258판을 낱낱이 읽었다. 그리고, 이를 주제별로 정리하여 일반대중이 불교의 교리(敎理)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체계화하여 불교대전을 편찬하였다. 이것이 19144월의 일이었다.

만해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19189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 교양지 유심(惟心)을 창간하였는데, 이는 일반 대중들에게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뿐만이 아니다. 만해의 빼앗긴 조국을 노래한 님의 침묵(沈黙)’은 아직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권용우  lawkwo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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