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離散家族의 날’을 되돌아본다

권용우l승인2014.08.05l0호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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離散家族의 날을 되돌아본다

 

 

권용우

(명예교수 법학)

 

 

오는 12일은 이산가족(離散家族)의 날이다. 이 날은 1971812일 대한적십자사(大韓赤十字社)남북한간의 이산가족찾기를 위한 회담을 개최할 것을 제안한 날을 기념하여, 1982년에 이 날을 이산가족의 날로 제정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 날이야 말로 남북으로 갈라진 혈육(血肉)의 재회를 기원하는 날이며, 민족의 재결합을 갈망하는 날이기도 하다.

이산가족의 만남을 바라는 것은 우리만이 아니다. 멀리 미국의 메릴랜드(Maryland) 주에서도 2011년부터 510일을 한국 이산가족의 날로 정하고, 우리의 분단현실과 이산(離散)의 아픔을 함께 하고 있다.

 

 

6 25戰爭이 낳은 悲劇, 離散家族

 

 

6 25전쟁은 피를 나눈 동족(同族)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31개월여를 밀고 밀리는 아비규환(阿鼻叫喚)의 비극이었다. 1950625일 새벽 4, 북한(北韓) 괴뢰집단(傀儡集團)의 불법남침(不法南侵)으로 시작된 6 25전쟁은 전국토(全國土)를 초토화하였고, 온 산야(山野)를 피로 물들였다.

어디 그 뿐이었던가. 피아간(彼我間) 인적 물적 손실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대한접십자사의 離散家族白書(1976)에 의하면,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한국군 149,005, 부상 717,083, 실종 132,256명이었다. 이 외에도 남한의 민간인 손실은, 사망 244,633, 학살 당한 사람이 128,935, 이북으로 납북된 사람이 84,532명이었으며, 실종자는 무려 303,212명이었다. 그리고, 북한의 인적 손실은 3백만명 이상이었는데, 당시 북한의 인구가 1천만명 정도였음에 비추어 볼 때 그 손실은 엄청난 것이었다. 전쟁의 피해는 이 뿐이 아니었다. 우리 남한의 재산손실은 무려 20억 달러였다. 이 액수는 그 당시 남한의 국민총생산액(GNP)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6 25전쟁이 남긴 인적 물적 손실이 이처럼 어마어마한 것이었지만, 이보다 더 큰 상처는 민족분단(民族分斷)의 고착화와 남북간 불신(不信)의 골을 더욱 깊게 했다는 데 있다. 이에 더하여, 전쟁이 할퀴고 간 한반도(韓半島)에 남북으로 갈라진 1천만 이산가족의 아픔은 우리 민족에게는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큰 상처를 남겼다.

이산가족의 아픔은 그들만의 아픔이 아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아픔이다. 우리는 이산가족들의 아픔을 생각할 때면, 1983KBS가 펼쳤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생방송을 떠올리게 된다. 이 프로그램은 6 25전쟁 33주년을 맞아 광복과 6 25전쟁으로 헤여진 이산가족을 찾아주기 위해서그 해 630일 밤 1015분부터 1114일까지 138일간 생방송으로 진행되었던 휴먼 드라마였다. 10만여명의 이산가족이 참여하여, 그 중 10,189명이 재회의 기쁨을 누렸다(조선일보 2013. 6. 28). 이는 뜨거운 혈육상봉(血肉相逢)의 감격이었다. 그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웃었다. 웃고, 또 울었다. 서로 부둥켜안고, 뒹굴었다. 온 나라가 울음바다로 변하지 않았던가. 서울에서도, 부산에서도, 제주도에서도 .

 

 

딸아, 統一까지 죽지 말자

 

 

31년 전 그 때를 생각하면서 이산가족의 날을 되돌아보니, 참으로 가슴이 멍멍하다.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이산가족 정보시스탬에 등록된 숫자가 128천여명이었는데, 20135,6월경 73천여명만이 생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대한적십자사 소식지 Redcross2013년 여름호). 그리고, 이에 따르면 이산가족은 70대 이상의 고령자이며, 80대 이상의 고령자도 52%를 넘는다고 한다. 가족의 생사(生死)를 모른 채 세상을 떠나는 이산가족이 하루에 10여명에 이른다고 하니, 이제 이들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처럼 이산가족의 고령화현상에 따른 대책의 하나로 2009년에는 남북 이산가족 생사확인 및 교류촉진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이산가족의 생사 및 교류를 촉진하기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필요한 정책을 수립 집행하여야 할 국가의 책무를 규정하였다(동법 41). 그리고, 통일부장관은 관계 중앙행정기관의 장과 협의하여 3년마다 이산가족 교류촉진 기본계획을 수립 시행하여야 하며(동법 51), 이산가족의 생사확인 및 교류촉진을 위하여 이산가족의 현황 및 교류 등에 관한 실태조사를 하여야 한다(동법 61).

그런데, 이처럼 우리 정부가 이산가족 상봉을 위하여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남북관계가 경색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이산가족들은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을 그리워하면서 밤낮 북쪽 하늘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20132, 박근혜(朴槿惠) 정부가 출범하면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통한 남북관계의 정상화를 내세우고, 유화정책(宥和政策)을 폈지만 이산가족 상봉의 기회는 오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인내하면서 북한을 설득하였다. 그리고, 금년 16, 박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설맞이 이산가족 상봉을 제의한 바도 있었다. 그 결과, 지난 220~25일에 34개월의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렸다. 금강산호텔에서 오랜만에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열렸다. 93세 아버지가 60여년만에 보는 딸을 부둥켜안고, “딸아, 통일까지 죽지 말자고 외쳤다. 이는 1 4 후퇴 때 남한으로 내려온 아버지가 북한에 두고 온 딸을 얼싸안고 한 말이다. 아버지는 딸의 손을 꼭 잡고 죽지 말고, 살아서 다시 만나자고도 했다. 그리고, 그들 부녀는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금강산호텔에서 가진 이산가족 상봉행사에서는 남북 이산가족 300여명이 그 동안의 설움을 쏟아냈다. 가족마다 사연이 많았다. 20대에 헤여져 생사도 몰랐던 강정구(86) 할아버지와 완구(81) 할아버지 형제의 사연도 참으로 기막혔다. 경기도 연천군에 살던 이들 형제는 6 25전쟁이 일어나자 형은 인민군으로, 동생은 국군으로 징집되어 형제가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싸워야 했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어떤 이는 링거를 꽂고 구급차로 금강산호텔로 갔다. 죽더라도 좋으니, 북에 두고 온 가족을 만나야겠다고 했다. 이들 가족은 21일 개별상봉만 마치고 구급차로 귀환했다니, 얼마나 한스러웠겠는가. 어떤 할머니는 60여년만에 북측의 딸을 만났지만 치매를 앓고 있어서 말 한 마디 못했다니, 이를 지켜본 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이제 이산가족들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산가족의 고령화로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하루라도 빨리 이들이 만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규모를 확대하고, 만남이 정례화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 금강산(金剛山) 지역에 마련된 이산가족 면회소도 하루 빨리 문을 활짝 열고 남북의 이산가족의 만남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면서, 이 글을 맺는다.


권용우  lawkwo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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