惠南 高秉國의 法思想을 照明한다
惠南 高秉國의 法思想을 照明한다
  • 권용우
  • 승인 2015.04.02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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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南 高秉國의 法思想을 照明한다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오는 5월 7일은 혜남(惠南) 고병국(高秉國) 교수가 세상을 떠난 날이다. 그는 1976년 5월 7일 67세를 일기(一期)로 영면하였다. 2015년 5월 7일은 그의 39주기(週忌)가 되는 날이다.

惠南의 生涯와 발자취


혜남은 1909년 1월 2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에서 한학자(漢學者) 집안의 3남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5세부터 12세까지 가숙(家塾)에서 한학(漢學)을 배웠는데, 주위 어른들로부터 아주 영특하다는 칭찬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신의주고등보통학교(新義州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하고, 1927년 일본 시즈오카고등학교(靜岡高等學校) 문과 갑류에 입학하여,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그리고, 1930년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법학부(英法專攻)에 입학하였으며, 재학 중 1932년 10월에 일본 고등고시(高等考試) 사법과(司法科)에, 그 이듬 해 11월에는 행정과(行政科)에 합격하였다.
그리고, 그는 사법 ․ 행정 양과를 합격하였지만 관직(官職)에 나아가지 아니하고, 1934년 3월 대학을 졸업한 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호즈미 시게또(穗積重遠) 교수를 지도교수로 모시고 민법학을 전공하였다. 1936년 4월, 그는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도쿄(東京)에서 후꾸다 스미오(福田澄夫) 변호사의 파트너로 활동하다가 1937년 9월에 귀국하여 변호사로서 활동하였다.

한편, 1938년 9월부터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에서 민법교수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로써, 혜남은 교육과 학문의 길에 들게 되었는데, 1945년 광복(光復)을 맞게 되면서 잠시 경성법학전문학교(京城法學專門學校) 교장으로 재직한 바도 있다. 그리고, 1946년 8월에는 국립 서울대학교가 설립되면서 경성법학전문학교가 이에 합병됨으로써 혜남은 서울대학교 초대 법과대학장의 직을 맡아서 학사행정의 기틀을 잡았다.
그런데, 이 때는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에 반대하는 학생과 교수들의 선동으로 참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그러나, 혜남은 요지부동한 자유주의자(自由主義者)로서 의 신념에 따라, 그리고 그를 따르는 교수와 학생들의 도움에 힘입어 수업을 계속하면서 초창기 법과대학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한편, 1948년에는 헌법(憲法) 제정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신생국가(新生國家)의 초석을 다지는 데 기여하였으며, 같은 해 법전편찬위원으로 위촉되어 민법(民法) 제정에 참여하여 총칙편(總則編)을 기초하였다. 이로써 혜남은 대한민국(大韓民國) 법제(法制)의 기본틀을 세우는 데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1954년 5월에는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으로 피임되었으며, 1967년부터는 한국법학교수회(韓國法學敎授會) 회장으로 피선되어 법학교수들의 친목도모와 학문진작에 온힘을 쏟았다.

그런데, 혜남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먼저 그의 고매한 인품에 머리가 숙여진다. “1938년 일정(日政) 당시 내가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중 사상사건(思想事件)으로 인하여 동직을 해임 당하고 무직으로 소일하고 있던 어느 날, 혜남이 나를 찾아와서 나의 후임으로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을 맡게 되었는데 내가 동교에 복직할 때가 오면 언제든지 그 직을 나에게 돌려줄 뜻을 전달하였다.” 이는 정광현(鄭光鉉 : 1902~1980) 교수의 술회이다. 이는 혜남이 참으로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 혜남은 참으로 청빈한 생활을 하셨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정직과 겸손을 몸소 실천하시고, 청빈한 삶을 보여준 이 시대의 선비이셨다. 그리고, 동료나 제자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실천하였다고 한다.

惠南의 學問과 法思想


혜남은 번역서로 로스코 파운드(Roscoe Pound : 1870~1964)의 저서 『Interpretations of Legal History』를 번역한 『법률사관』(일한도서, 1953)과 역시 로스코 파운드의 『New Paths of the Law』를 번역한 『법의 새로운 길』(법문사, 1961)이 있다. 그리고,『법률학사전』(공편, 청구문화사, 1954)과 『영미법사전』(공편, 백영사, 1958) 등의 편저가 있으며, 저서로 『법학개론』(공저, 박영사, 1961)이 있다.
혜남의 번역서인 『법률사관』과 『법의 새로운 길』의 출간은 그 당시로서는 영미법(英美法)과 법사상(法思想)에 관해서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의 법학계에 큰 업적으로 평가되었다.
그런데, 민법학자로서 민법학에 관한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왜, 그러하였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광복 후 혼란한 상황에서 경성법학전문학교 교장으로서, 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장 등의 행정책임자로 전념하는 동안 집필의 기회를 놓친 것은 아닐까. 그 뒤에도 단국대학(檀國大學) 학장, 경희대학교(慶熙大學校) 대학원장과 총장을 역임한 바 있음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추리는 가능할 수도 있을 듯 하다. 또, 오랜 기간 동안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도 민법학에 관한 저술을 출간하지 못한 이유일 수 있을 것이다.

혜남은 법학논문도 많이 남기지 않다. “실용주의 법률사조”(서울대 대학신문 1953. 5. 2)과 “계약의 자유와 제한”(학술원논문집 인문사회편 13집, 1974) 등이 있다. 이 두 편의 논문과 각종 연설문을 통해서 혜남의 법사상(法思想)을 살펴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혜남은 로스코 파운드의 법사상에 상당이 매료되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로스코 파운드의 법사상이 혜남의 법사상을 추론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혜남은 “법은 그 사회의 사회적 ․ 경제적 ․ 정치적 요청에 상응해서 창조되는 것”이며(서울대 법대학보 창간사), “법학은 인간체험과 깊이 관련된 학문”(위의 법대학보 제2호)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는 ‘법학자가 법학의 깊음을 깨닫지 못하고 법률의 표면적인 형식에만 매몰되어 있는 것’을 경계하면서 형식주의적 법률만능사상(法律萬能思想)을 배격하였다.
그리고, 혜남은 실용주의(實用主義) 법사상을 강조하였다. 즉, “법에 대하여 가치판단의 절대적인 기준을 찾기 보다는 모든 사회적인 이익을 형량하여 그 상호의 평균 또는 조화 ․ 조정에 노력하는 것이 법학자의 임무”라고 주장하였다(고병국 “실용주의 법률사조”). 이는 로스코 파운드나 홈즈(Holmes, O. W : 1841~1935)의 법사상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특히, 홈즈는 그의 처녀작인 『The Common Law』(1881)에서 “법의 생명은 논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험에 있다”고 쓰고 있다. 아마도 혜남은 홈즈의 이러한 법사상에 매료된 것이 아닌가 싶다.
권용우
권용우

 lawkwo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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