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네코 후미코의 선언
가네코 후미코의 선언
  • 김명섭 사학과 강사·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15.06.04 20:09
  • 호수 139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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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일본천황을 죽이려 했나
▲ 1926년 옥중에서 재판관의 배려로 함께 사진을 찍게 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이 사진으로 일본내각이 총사퇴했다.

“일본은 끊임없이 천황을 받드는 세계에서 유일한 국체이다… 오히려 만세일계의 천황인가 하는 자에게 형식상으로라도 통치권을 주어왔다는 것은 일본 땅에서 태어난 인간의 최대 치욕이며 일본민중의 무지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2015년 세계 양심인들과 위안부 할머니들을 농락하고 있는 아베 일본 수상이 들으면 대경실색하겠지만, 이 말은 일본 요코하마 태생인 나 가네코 후미코가 71년 전 5월 일본 판사에 한 법정진술이오. ‘천황의 나라’인 일본에 태어난 내가 어떻게 식민지 청년인 박열을 사랑했고, 천황일가에 폭탄을 던지려 했는지 알려주려 하오. 나의 23년 짧은 삶은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가 되어 일본인 전체를 전쟁광으로 만들고 아시아 민중을 그 희생양으로 삼은 암흑의 세월 그 자체였소.
난 경찰서 순사의 딸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어머니의 여동생을 후처로 삼을 정도로 방탕하고 무책임한 남자였소. 그는 8살이 되도록 호적에 올려주지 않아 난 무적자로 학교에 가지 못했지요. 무능력했던 어머니는 여러 남자에 의지하며 살았기에 난 외할아버지댁에 입적돼 조선 충북 청주군 부용면에서 살게 되었소.
조선에서 약 7년을 살았지만 아편밀매와 고리대금업을 하던 할머니, 고모부부의 갖은 학대와 멸시를 받아야 했소. 배고픔과 폭력에 시달려 자살유혹도 많았던 나를 위로해 준 사람은 조선 아줌마들이었지요. 가장 인상 깊은 건 1919년 3월 마을 주민들이 일으킨 만세시위운동이었는데, 일본헌병들의 잔인상과 조선인들의 저항을 목격하고 권력에 대한 반역적 기운이 일기 시작했지요.
일본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다시 충돌한 난 도쿄로 나와 신문팔이·노점상·식모·오뎅집 점원으로 살았지요. 그러면서 배움에 뜻을 두어 영어학교를 다녔는데, 이 곳에서 한인 유학생들을 알게 되고 그들이 만든 신문 속에 박열이란 학생이 쓴 시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오. 그래 그를 어렵게 만나 독립운동가로 살고자 하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지요. 우린 곧 동지로서 동거에 들어갔고, 한인들의 첫 사상단체인 흑도회의 기관지 편집을 맡아 발간했소.
이어 공산주의자들이 북성회를 만들어 탈퇴하고 아나키스트들만 모여 흑우회를 만들자, 나와 박열은 기관지 발간과 항일활동에 나섰지요. 박열은 몰래 상해 의열단과 연락해 폭탄을 유입하려 동분서주하였지요. 그러다 1923년 9월 1일 도쿄 대지진이 일어났는데, 일본경찰들이 우리를 잡아 가두더니 취조를 하더이다. 그러다 박열이 폭탄을 유입하려 했다는 정보를 듣더니 우리를 ‘진재를 틈타 천황을 암살하려한 비밀결사’로 몰고 말았지요.
박열은 당당히 폭탄입수계획이 있었음을 밝혔고, 나도 이참에 일본 천황제와 조선침략의 부당성을 알리게 되었소. 일본 정부와 법원은 나를 전향시키고 모든 죄를 박열에게 씌우려했지만, 일본 제국주의를 저주하고 박열을 사랑하는 나는 그와 함께 당당히 사형판결을 받기로 했소. 허나 박열의 아이를 가진 내가 옥중에서 출산할 것을 두려워한 일제는 1926년 7월 23일 나를 죽이고 자살했다고 발표하는구려. 비록 지금도 일본땅은 나를 ‘대역사범’이라 부르며 이름조차 꺼내기 꺼리고 있지만, 또다시 아시아를 전쟁터로 만들고자 한다면 내 또다시 평화를 지키는 ‘정의의 폭탄’이 되고자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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