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으로 만나는 청춘의 순간들 15. 우리에게 남겨진 실천
철학으로 만나는 청춘의 순간들 15. 우리에게 남겨진 실천
  • 김성현(철학·3)
  • 승인 2015.10.06 16:04
  • 호수 139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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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동적 주체가 되기 위한 ‘이유있는 실천’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다” 누구나 어렵잖게 한번쯤 들어보았던 말이다. 이 말의 역사는 결코 짧지 않으며, 국경마저도 초월한다. 우리는 이의 원본이라고 인용되는 각양각색의 출처들을 알고 있다.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의 낙서라든지, 소크라테스의 말이라든지 하는 것들 말이다. 하지만 어느 하나 제대로 된 출처는 없다. 대부분은 와전된 것인데, 예컨대 소크라테스의 경우 자초지종은 이렇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구름』은 소피스트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풍자를 담고 있다. 그런데 해당 작품에서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의 한 전형으로 등장한다. 말하자면 극중의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비판한 것이, 졸지에 소크라테스 본인의 어록에 포함되고 만 것이다.

고대 젊은이들의 ‘버릇없음’이 정말 사실이라면, 오늘날의 청년들은 비난을 손쉽게 모면할 수 있는 방편 하나를 얻게 되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출처들은 확실히 근거 없는 것이지만, 우리는 맹자에게서 하나의 증언을 확보할 수 있다. 『맹자』의 공손추(公孫丑) 하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한다. “요즘 군자는 잘못하면 그것을 굳히고 만다 (今之君子 過則順之)” 고대 중국의 맹자가 보기에도, 윗세대들은 잘못을 즉각 인정하고 고치려 하였으나 아랫세대들은 그렇지 못했나보다. 이로써 젊은이들의 ‘버릇없음’은 역사를 초월한 특성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하지만 혹자들에게는 어제의 젊은이와 오늘의 젊은이를 동일선상에 두는 것이 여전히 아니꼽다. 그들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오늘의 젊은이들은 확실히 타락해 있는 자들이다. ‘N포세대’라는 신조어는 오늘날 젊은이들의 무기력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지표이다. 강의실에 거의 머무는 일 없이 거리로 나서던 ‘486’은 이제 기성세대가 되었고, 더 이상 과거와 같이 투사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오늘의 청년들이 과거 자신들의 실천을 물려받지 않는다고 분개한다. 말하자면 ‘요즘 것들’은 버릇뿐만 아니라 도전정신도, 개선의지도 결여되어 있다. 아니, 요즘 것들에겐 애초 아무런 문제의식 자체가 없는 듯 보인다.

청년들이 정말로 타락했단 말일까. 하지만 고작 한두 세대 만에 인간존재의 타락이 완료될 수 있다면 그 또한 놀라운 일일 것이다. 애초 윗세대와 아랫세대 각자가 밟고 서있는 역사적 지평 자체가 다르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불과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맑시즘(marxism)을 필두로 한 실천이론들이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지 않았던가. 하지만 오늘날의 세계에선, 마치 모든 실천 철학은 패배하고 오로지 자본주의만이 역사의 영원한 승자인 것처럼 대두되고 있다. 역사의 종언이란 다름이 아니라 이와 같은 실천 철학의 무기력증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의 종언 이후 등장한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겐, 무기력증이란 거의 선천적인 것이나 진배없다.

과거의 청년들이 각자 사명으로 삼고 목숨까지도 걸 수 있었던 ‘혁명이론’ 같은 것이, 오늘날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역사는 대안적인 모든 체제들이 실패적이라는 사실만을 강조한다. 젊은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학교·종교기관·미디어를 비롯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부터 자본주의 체제의 진리성을 학습 받는다. 각각의 주체들은 더 이상 자율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지 못한다. 그들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부름을 받아야지만 비로소 주체로서 구성될 수 있는, 타율적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것이 곧 알튀세르의 ‘호명(Interpellation) 이론’의 간략한 줄거리이다. 이러한 시나리오에서 주체는 수동적인 것으로 끌어내려진다. 오늘날의 청년들은 이와 같은 타율적 주체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이다. 어느 누구도 체제의 견고함에 감히 도전하지 못하며, 그저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만을 탓할 뿐이다. 피나는 노력으로 사회가 성공이라고 부르는 것에 근접해 가거나, 원하는 바를 하나둘 포기하면서 억지로 자신을 사회 속에 밀어 넣는 길만이 남았다. 그 밖의 모든 대안은 청년들에게 현실적인 것으로 와 닿지 않는다.

시인 이성복은 「그날」에서 80년대의 병증을 이렇게 진단한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 진단은 아직까지도 유효하다. 오히려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병들었다고 말해주어도 모두 비웃기만 할 뿐이니. 하지만 그것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비웃음이라곤 생각지 않는다. 누군들 그 속에 말 못할 아픔을 숨기지 않은 자가 있을까. 반역을 위한 일말의 희망마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통스럽다. 그러나 절망하여 주저앉는 것은 우리 할 일이 아니다. 무기력증에 빠진 실천 철학을 구출해내는 과제가 우리 세대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혁명적 이론 없이 혁명적 실천도 없다” 그래서 레닌은 혁명을 위한 사유를 만들어낸 것 아닌가. 이제 우린 보다 능동적으로 사유를 시작해야 한다.
 

김성현(철학·3)
김성현(철학·3)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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