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고백 <35> 나철의 눈물
역사고백 <35> 나철의 눈물
  • 김명섭 사학과 강사·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15.10.06 16:06
  • 호수 139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내가 단군조상을 새로 일으킨 까닭은
▲ 5천년 민족종교인 단군교(대종교)를 다시 부활시킨 홍암 나철

10월 3일은 우리 한민족이 첫 나라를 연 개천절이요, 9일 한글날이라. 개천절은 고조선 시절부터 내려온 하늘제사를 모신 날로 한민족의 화합과 번영을 기린 5천년 전통이요, 한글날은 유일하게 반포일을 기념하는 세계문화유산이라. 허나 많은 후손들이 그저 공휴일로만 알고, 고조선을 옛 신화로 가르치고 있으며, 심지어 단군상을 우상숭배라며 깨부수고 외계어로 한글을 파괴하려하니 차마 통탄할 따름이라.
물론 나 역시 29세인 1892년까지 공·맹자 학설만을 진리로 알고 과거에 급제해 관리가 될 꿈을 꾼 넋 나간 시절도 있었소. 허나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 명성황후 시해사건 등을 겪으며 국운이 극히 쇠망하는 것을 보고, 벼슬길 포기하고 구국의 길로 나섰지요.

다행히 고종황제의 배려로 몇 달 만에 사면되어 다시금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신도와 천황제도를 연구하였소. 그러던 중 전래 단군신앙 수행의 우두머리인 두일백을 만나 전래경전을 얻게 되었고, 운명의 1908년 12월 9일 밤 영계를 받게 되었소. ‘나라는 비록 망했으나 정신은 가히 존재한다’는 그의 가르침은 국망으로 절망한 나를 단군사상 전도자로서 희망을 찾게 해준 것이지요.

마침내 나는 동지들과 함께 1909년 1월 15일 천제를 행하고, 단군교 포명서를 선포해 단군신앙(대종교)을 일으켰소. 내가 수많은 교주들과 달리 대종교를 창교가 아닌 다시 일으킨다고 쓴 것은 스스로 단군교에 입교해 전래 신교인 단군신앙을 후대에 전하려 함이니, 이는 몽고침략 이후 7백년 동안 단절되었던 배달민족의 고유 신앙을 부활시키려는 것이오.

다행히 많은 동포들이 이에 감응하여 신도가 수만명으로 늘어나니, 일제가 사이비종교라 탄압하여 국내에 머물 수 없었소. 1914년 5월 우리는 민족의 영산 백두산으로 가 천제를 지내고, 북쪽 기슭인 화룡현 청파호로 총본사를 옮겼소. 교세는 만주 일대로 퍼져나가 수천여명이 동시에 입도하였고, 30만명이 넘는 애국지사들이 일요일마다 한얼노래를 부르며 조국독립과 민족부흥을 맹세하였지요.  

독립운동에 앞장 선 대종교인으로는 우선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위원급 중 이시영·박은식·이동녕 등 20여명이 넘소. 특히 만주 무장독립운동사의 주축인 서로군정서의 여준과 홍범도·김승학을 비롯해 북로군정서의 김혁·김좌진 등이 지도자로 활동했지요. 또 나의 제자 서일은 동도본사 책임을 맡아 청산리전투를 총지휘했으니, 가히 독립전쟁의 정신적 지도이념이 아닐 수 없지요.

나를 이은 2세 교주 김교헌은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해 1919년 2·8독립선언서와 3·1독립선언서의 발판이 되었지요. 3세 교주 윤세복 역시 독립단체 육성을 비롯해 수많은 민족학교를 세워 청년들을 양성했소. 그러니 일제가 대종교인들에겐 어떠한 회유도 없이 무조건 잔혹하게 고문하고 학살해 민족뿌리를 없애려 한 것이오. 이런 단군의 정신, 독립운동의 선봉에 선 대종교의 민족정신이 우리 교도 중 한사람인 장형과 장도빈 선생이 단국대학교를 세워 민족정신을 가르친다니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소. 허나 이렇게 힘들여 세운 대한민국 정부가 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좌편향, ‘자학사관’이라며 뜯어고치고 국정화 하려 하니 내 통탄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소이다. 일본은 자위대법을 날치기 통과시켜 또다시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부활하고 있건만, 우리 후손들은 제나라 역사와 정신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채 남북대결만 열 올리고 있단 말이오? 참으로 통탄스러울 따름이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