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올해도 어김없이 엄마로부터 김장 김치를 받았다. 해마다 김장 김치를 받으면 어릴 적 김장하는 날이 떠오른다. 김장하는 날은 마당이 온통 배추밭 같았다. 정신없이 김장에 바쁜 어른들을 귀찮게 하며 쪼그리고 앉아 방금 무친 배추를 날름날름 받아먹던 내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큰 김장독마다 가득 김치가 담기면 엄마는 대식구의 겨우내 식단을 해결한 뿌듯함에 피곤할 줄도 모르셨다. 그 때의 엄마보다 더 나이가 들었지만 나는 여전히 엄마표 김치를 얻어먹고 있다. 엄마표 김치의 중독성이 얼마나 강한지 나도 우리 가족도 사서 먹는 김치를 영 싫어한다. 엄마표 김치에 인이 박힌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은 모두 김치에 인이 박혀 무슨 음식을 먹어도 김치가 당긴다. 김치는 대표적 발효 식품이다. 발효와 부패는 사실 동일한 현상이다. 발효는 미생물이 각종 효소를 분비하여 유기화합물을 산화, 환원 또는 분해, 합성시키는 반응이다.
부패도 미생물이 유기물에 작용하여 생기는 반응이다. 다만, 미생물이 작용하여 우리가 원하는 좋은 물질이 만들어지면 발효, 원하지 않은 물질로 변하면 부패라고 하는 점이 다르다. 발효 식품이 인체에 이롭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불가리아가 장수 국가가 된 것은 대표적 발효 식품인 요구르트 덕분이라고 한다.
항암 효과와 정장 작용이 뛰어난 요구르트 보다 훨씬 더 우수한 발효 식품이 우리의 김치다. 김치의 발효 과정은 ‘김치 생태계’라고도 불릴 정도로 다이내믹하다. 김치를 담근 후 초기에 일반 세균은 최대 10배까지 급속도로 증식하다가 다시 급속도로 사멸한다. 세균들의 먹이가 줄어드는데다가 세균들이 생성한 이산화탄소가 포화 상태에 이르러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는 환경이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 혐기성 미생물인 유산균만이 생존 가능한 환경이 된다. 만약 다른 미생물이 나타나면, 수십 종의 유산균이 함께 ‘박테리오신’이라는 항생 물질을 내뿜어 물리친다. 처음에는 유산과 에탄올 등 여러 유기물을 생산하는 유산균이 우세하지만, 나중에는 유산만을 내는 유산균이 지배하게 된다.
갓 담은 김치에 포함된 유산균이 1㎖ 당 1만개 정도지만, 김치를 저온 숙성으로 발효시킨 후 -1℃에서 보관하면 6,300만 개로 6,000배 이상 증가한다. 잘 익은 김치에 있는 유산균의 종류도 수십 가지라고 한다. 유산균이 뿜어내는 유산으로 김치의 산도는 점차 증가하는데, 김치 1㎖ 당 최대 10억∼100억 개까지 증식하면 유산균은 자신이 만든 유산 환경에서 더 이상 생존하지 못하고 죽게 된다.
이 때 유산을 먹는 효모가 나타난다. 군내 나는 김치에 있는 허연 물질이 바로 효모다. 곰팡이, 세균, 효모 등이 섞여 사는 보통의 발효 식품과는 달리 김치는 대부분의 시기에 유산균만이 살아간다. 김치야말로 세계 최고의 유산균 발효 식품이고, 과학적으로 따질수록 식품 분야 최고의 무형 문화재 감이다.
인공 조미료를 첨가한 절임 식품에 불과한 일본의 기무치는 우리의 김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여러 가지 면에서 미흡하다. 우리 김치의 우수성을 알리는 연구는 이미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고 엄마의 손맛 차이까지 과학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김치 맛을 좌우하는 미생물이 발견되면서 이 미생물을 이용해 담근 김치인 ‘스타터 김치’도 이미 개발되었다. 이러다가 김치가 다 표준화되어 집집마다의 색다른 김치 맛이 사라지면 어떡하나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