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날을 일주일 남겨두고 CICD가 발칵 뒤집혔다. 몇몇 친구들이 규정을 어기고 교내에서 술을 마시고 마리화나를 피우다 발각된 것이다. 그들은 학교 측과의 면담 후 다음 팀으로 옮기거나, DI프로그램을 떠나야만 했다. 우리팀은 예정대로라면 5월 1일에 말라위나 모잠비크로 떠났어야 했는데 펀드레이징 머니가 부족한 관계로 출발일이 열흘 늦춰졌다.
떠나야 할 사람들은 학교에 여전히 있는데, 머물러야 할 친구들이 한 번의 실수로 떠나가는 것을 보니 괜스레 마음이 아렸다. 같은 시기, 학교 친구들이 떠나는 우리팀을 위해 굿바이파티를 준비한다고 바빠졌다. 다큐멘터리 감독이었다는 한 친구는 우리팀 영상을 만들어주겠노라며 내게 그간 팀원들과 찍은 사진들을 usb에 담아가기도 했다.
말라리아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저녁식사 후에 하루에 한 알씩 삼키며 나는 괜스레 아프리카와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몇몇 친구들은 약 때문에 두통 증세나 속이 불편한 증상을 호소했지만 나는 별다른 증세가 없었다. 다만 잠자리에 들면 그간 꾸지 않아왔던 이상한 꿈들을 꿔 나는 마치 긴 모험에 나선 꼬마인 냥 꿈속을 헤엄쳐 다녔다. 오래 전 아프리카에 다녀온 한 DI가 말라리아약을 먹고 순간순간 더 예민해진 건 물론이고 한 때는 악몽에 시달렸었다는 얘길 해 준 적이 있다.
이 때문에 잠자리에 들 때마다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후에 나는 꿈꾸는 것마저 즐기게 됐다. 엄마에게도 메일이 왔다. 몇 년 전 아프리카 여행을 했던 엄마는 현지에 도착해 지켜야 할 것에 대한 리스트를 작성해 보내주었다. 마지막 리스트에 올라와 있는 것은 “대한민국의 딸임을 잊지 말 것”. 나는 이에 추가로 나만의 리스트를 작성했다. “초심을 잃지 말고, 봉사자의 신분임을 자각할 것”.
고백하자면 8개월의 지난 CICD생활을 돌아보면 순간순간 나는 나태해졌었고 무의미하게 하루를 보낸 날도 적지 않았다. 아프리카에 가면 나보다는 그들을 먼저 생각하리라,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웃으며 떠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다시금 실감했다. 아프리카에 가져갈 옷가지를 챙기고 지난 밤 입고 잤던 옷을 마지막으로 세탁하러 가는 길, 나는 그간 학교에서 즐겁게 우정을 나눠왔던 안토니오 선생님을 만났다.
그 씨앗이 초록 싹을 틔우고 예쁘게 열매를 맺는 것은 내게 달렸을 것이다. 현지에 도착하면 그간 참 많이 보고 싶었었다고 아프리카에게 인사해야겠다. 함께 일하게 될 프로젝트 리더와 스태프들에게도, 따뜻한 심장을 가졌다는 말라위 주민들에게도 “Moni onse!(말라위 토속어인 Chichewa로 안녕이라는 뜻)”하며 포옹을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