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과 함께 사라지는 것들
언론에서 다루는 이슈를 기상에 빗대어 표현할 수 있다면, 26일 서해 백령도 인근에서 가라앉은 천안함 사건은 가히 ‘초특급 태풍’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고자체의 규모도 그렇지만 100여명이 탑승하는 전투함이 평시에 침몰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물기 때문이다. 더구나 적국(敵國)을 지척에 둔 지점에서 의문스러운 폭발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사건자체의 폭발력이 강하므로 뉴스가치가 매우 큰 것으로 분류된다. 국내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 언론이 앞다투어 천안함 침몰 사고를 긴급뉴스로 타전한 것은 이런 상황을 반영한다.
태풍이 쓸고 간 자리가 황량해 지듯이, 거대한 이슈가 휩쓸고 간 뒤의 정정(政情)은 고요하다. 초특급 태풍은 ‘부수적 피해’를 수반하긴 하지만 그 전까지 쌓여있던 국내정치의 온갖 요소들을 일거에 정리해주는 효과가 있다. 초계함 침몰이라는 거대한 이슈 앞에 국내정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특히 분단국인 한국에서 군사와 관련된 이슈는 그 중요도가 매우 높기 때문에 뉴스 윗머리에 놓이게 된다. 군사정부 시절, 선거를 앞두고 국내 정치상황이 집권 측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면 심심찮게 기획되던 ‘북풍’은 군사뉴스의 효용성(?)을 말해준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국내정치의 연장선에 있다”고 설파했다.
모든 이슈가 초계함의 침몰과 함께 심연으로 가라앉은 지금, 내심 웃고 있는 자는 누구일까. 유추해보기는 어렵지 않다. 며칠 전의 신문 몇 장만 뒤지면 답이 나온다. 그 전까지의 이슈의 중심에는 불교계와 안상수 원내대표가 있었다. 잇따른 좌파척결 발언으로 구설에 오른 안대표가 현 정부에 비판적인 봉은사 명진스님을 좌파스님으로 지목한 것이다. 종교 편향적이라고 손가락질 받아 온 정부 입장에서는 매우 불리한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일부 언론들은 10·27 법난(1980년 신군부의 불교계 탄압사건)의 최신판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모르긴 모르되 집권당의 귀에는 표 떨어지는 소리가 ‘우수수’ 들렸을 법하다.
적절한 시점에 몰아닥친 태풍은 집권 측 입장에선 ‘천재일우’에 틀림없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집권당은 야당에 판판이 밀리고 있었다. 무상급식 논란에선 여당은 복지에 무딘 정당으로 낙인찍히고 있었고, 서울시장 출마가 유력시되는 한명숙 전 총리의 재판에서는 검찰이 유죄를 입증하지 못해 애를 먹고 있었다. 대통령의 ‘독도발언’에다 1000만 불심을 자극할 안상수 원내대표의 ‘좌파발언’ 까지…. 여당측은 총체적 난국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초계함 사건은 안대표와 여당에겐 반가운 태풍일 것이다. 골칫거리였던 국내 이슈를 휩쓸어 버리는 효과와 보수의 강점인 ‘안보’를 전면에 내세울 수 있는 기회다.
정보의 통제권은 정부가 쥐고 있다. 정부는 정보를 언론에 조금씩 던져주면서 이 국면을 최대한 오래 끌어가려고 할 것이다. 그래야 잠복해 있던 국내 정치 이슈가 수면위로 떠오르지 않는다. ‘강호순 사건’을 활용해 언론으로 하여금 용산참사 이슈를 밀어내게 만들었던 현 정부의 대언론 전략은 좋은 예시다. 언론 입장에선 알면서도 받아 쓸 수밖에 없는 처지다. 상업언론의 존재근거는 수익창출이다. 정부가 통제를 잘 한다면 한동안 신문 1면에서 국내 정치 뉴스를 찾아보기가 힘들 것이다. 독자는 정보의 이면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뉴스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권력의 음험함을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안상수 원내대표나 신영철 대법관 같은 행운아들이 이런 상황에서 가슴을 쓸어내리는 일을 막을 수 있다.
P.S. 필자는 해군 2함대 출신이다. 복무 기간 동안 천안함을 수시로 보았다. 누구 못지않게 이번 사고가 안타깝다. 실종자 전원의 무사귀환을 빌고 또 빈다.
조영갑(언론홍보·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