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언의 음식인문학] ⑩김종삼의 「물 통」과 물
[김주언의 음식인문학] ⑩김종삼의 「물 통」과 물
  • 김주언(교양학부) 강의전담 전임강사
  • 승인 2011.11.22 14:12
  • 호수 13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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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물로 보지 마라


희미한
풍금 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 아닌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
      ― 「물 통」 중에서

 

물은 심오한 것이다. 공기처럼 자명하여 우리가 의식하지는 않지만(혹은 못하지만)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 속에는 반드시 얼마간의 물이 있게 마련이다. 단식을 하는 사람도 물은 마셔야 산다. 사람 몸의 70%가 물이고, 특히 뇌는 85%가 물이라고 한다. 태생이 습생이어서 우리는 희로애락의 절정에서 물과 함께하는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래서일까. 물을 단지 물로 보지 않는 통찰은 동서고금이 따로 없다.


서양 철학의 아버지라고 하는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는 말을 한 이로 유명하다. 이 주장은 과학적인 신빙성 여부보다는 만물의 배후를 꿰뚫어보고자 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동양에서는 공자가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한다(智者樂水)”고 해서 물에 인상적인 캐릭터를 부여했다면, 노자는 아예 물 예찬론자에 가깝다. 노자의 『도덕경』의 첫 구절은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上善若水)”는 말로 시작한다. 물론 물 이상의 물은 철학의 전유물이 아닐 것이다. 70년대에 「물 좀 주소」를 노래한 한대수에 의하면 ‘물은 사랑’이다. 김지하가 신새벽 뒷골목에서 떨리는 손으로 남 몰래 ‘민주주의’를 쓴 힘의 원천은 다름 아닌 ‘타는 목마름’이라는 숨은 물이었다. 


“그 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다름 아닌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 답하는 사람은 물론 생수배달업자가 아니다. 김종삼은 여기서 1920년대 「북청 물장수」의 김동환을 흉내내고자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인생 뭐 별거 있냐’는 식의 시니컬한 문답이 추구된 것도 아니다. 문답은 연갈이를 하면서 진행될 정도로 진지하고 심각하다. 한 사람의 생애의 가능성과 한계가 물 몇 통을 길러다 준 것으로 요약되고 정의될 수도 있다니, 대체 물이란 어떤 수수께끼를 갖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튼 시인은 물을 단지 물로 보지 않는 흐름에 물 몇 통을 더 보탠 셈인데, 우리 문학사는 물 몇 통이 아니라 단 한 모금의 물에 대한 갈급에 대해서도 허투로 취급하지 않았다. 김동인, 이광수, 김남천 등이 단적인 사례이다. 이제부터 차례로 그들의 ‘물’과 갈급을 찾아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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