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지금의 그들의 머리에는 독립도 없고 민족자결도 없고 자유도 없고 사랑스러운 아내나 아들이며 부모도 없고 또는 더위를 깨달을 만한 새로운 신경도 없다. 무거운 공기와 더위에게 괴로움받고 학대받아서 조그맣게 두개골 속에 웅크리고 있는 그들의 피곤한 뇌에 다만 한 가지의 바람이 있다 하면, 그것은 냉수 한 모금이었다. 나라를 팔고 고향을 팔고 친척을 팔고 또는 뒤에 이를 모든 행복을 희생하여서라도 바꿀 값이 있는 것은 냉수 한 모금밖에는 없었다.
― 김동인, 「태형」 중에서
여기 식민지라는 감옥이 있다. 식민지 자체가 다름 아닌 감옥이라는 은유로 성이 차지 않는다면 실제로 식민지 공간에 감옥을 만들 수도 있다. 식민지의 감옥, 그것도 다섯 평이 못 되는 방에 20명을 집어넣어본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니, 28명을 집어넣어본다면. 아니,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다시 34명을, 더 나아가 41명을 수감해 본다면 어떨까. 그것도 여름에. 여기에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쥐어짜야 한층 더 끔찍한 인간 실험실의 감옥이 완성될 수 있을까. 「태형」(1923)이라는 소설에서 이 궁리에 빠져 있는 작가는 김동인이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저자 신영복 교수에 의하면 여름 감옥보다는 겨울 감옥이 더 낫다고 한다. 겨울이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반면에 여름은 옆 사람을 단지 삼십칠도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해 옆 사람을 증오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동인이 그리는 식민지 시대의 찜통 여름 감방은 물론 이런 감방에 비할 바가 아니다. 「태형」은 갈 데까지 간다. 누군가는 맞아죽어도 그 죽음 덕택에 조금이라도 감방의 공간이 헐거워진다면 죽음까지도 반기는 상황이다. 평양의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풍운아처럼 낭만적 기질로 일세를 풍미한 김동인은 이제 딱한 처지의 사람들의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일 만큼 철이 든 것인가.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다.
「태형」에서 한여름의 감옥을 만들어 온갖 방법으로 지옥을 쥐어짜는 김동인은, 바로 「감자」(1925)에서 “싸움, 간통, 살인, 도적, 구걸, 징역 이 세상의 모든 비극과 활극의 근원지인, 칠성문 밖 빈민굴”이라는 또다른 실험실로 자신의 주인공을 몰아간 작가이다. 김동인의 관심은 숙명의 라이벌 이광수를 대적하기 위해 더욱 공을 들이는 자연주의 스타일에 있을 뿐이다. 김동인이 우리에게는 오직 이것밖에 없다고 유일한 진리처럼 내미는 ‘냉수 한 모금’은, 생리적 욕구가 사람을 사람답게 해주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되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정녕 그렇다면 목구멍과 창자는 얼마나 부정되어야 할 인간 조건인 것이냐. 김동인은 아무래도 너무한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다름 아닌 김동인의 영원한 맞수이자 선배인 이광수가 「무명」으로 김동인이 그렇게 엄살을 떤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나섰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