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언의 음식인문학 ]⑫ 이광수의 「무명」과 밥
[김주언의 음식인문학 ]⑫ 이광수의 「무명」과 밥
  • 김주언(교양학부) 강의전담 전임강사
  • 승인 2012.01.03 13:07
  • 호수 13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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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의 즐거움을 골고루 받게 하소서

노긋노긋한 흰밥. 이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고마운 것인 줄은 감옥에 들어와본 사람이라야 알 것이다. 밥의 하얀빛, 그 향기, 젓갈로 집고 입에 넣어 씹을 때의 그 촉각, 그 맛, 이것은 천지간에 있는 모든 물건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라고 느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쌀밥, 이러한 말까지도 신기한, 거룩한 음향을 가진 것같이 느껴졌다. 이렇게 밥의 고마움을 느낄 때에 합장하고 하늘을 우러러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밥의 즐거움을 골고루 받게 하소서!’ 하고 빌지 아니할 사람이 있을까?                    
- 이광수,「무명」 중에

 

  이광수의 「무명」(1939)은 지난번에 다루었던 김동인의 「태형」과 마찬가지로 작가의 옥중 체험의 소산이다. 따라서 주인공 ‘나’에게는 불가피하게 이광수 자신의 모습이 어느 정도 투영되어 있는데, 이 인물의 돌올함은 먹고-싸는 문제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감옥 중에서도 환자들을 수용하는 병감에 수감된 ‘나’는 다른 잡범들의 인생 멘토이기도 하다. 어떻게 ‘나’는 멘토일 수 있는가. ‘나’는 먹기는 하지만 단  한번도 싸지는 않는 존재이다. 선생님은 화장실에 가지 않는 것이다! 이런 설정 자체에서 우리는 이광수 인물 특유의 어떤 위선을 읽어낼 수 있다. 위선은 악과 다른 것이다. 악이 가진 직접성과 우발성의 순수성이 위선에는 없다. 대신 교묘한 계산이 있다. 악은 어린아이와 어울릴 수 있지만, 위선은 어린아이와 어울리지 못한다. ‘악동’이란 말은 있어도 ‘위선동’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 이 위선의 포즈가 햇빛을 가린 구름이 걷히듯이 말끔히 걷히고 무색해지는 대목이 있다. 바로 위에서 인용한 대목이 그렇다.


  식민지 시대에 살지도 않고, 감옥에도 들어가 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구나 병감 같은 곳은 상상하기도 힘든 우리들은, 물론 저런 ‘흰밥’의 고마움을 알 리 없다.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도 물론 알 리 없다. 우주까지는 아니더라도, 쌀 한 톨도 허투루 여기지 않고 그것이 목구멍으로 오기까지의 과정을 눈물겹게 생각한다면 촌스러운 궁상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 부황한 풍요의 시대에도 여전히 굶주리고 있으며, 바로 그 굶주림 때문에 목숨까지도 잃는 야만이 바로 이 지구상에서 지금도 엄존하고 있다. 남의 나라 먼 얘기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밥 먹여주는 복지는 지속되고 있는 주요 의제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풀어나가야 할 무거운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새해가 밝았다. 해월 최시형은 “만사지(萬事知)는 식일완(食一碗)”이라고 했다. 밥 한 그릇을 먹게 되는 이치를 알게 되면 세상 모든 이치를 다 알게 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이치는커녕 작은 사리 하나에도 어두운 사람들에게도 식민지 병감에서 이광수가 그린 저 ‘흰밥’의 희망과 축복이 넉넉한 덕담으로 번지는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광수가 말한다. 아니, 뜨거운 밥의 뜨거운 희망과 축복을 함께 나누고 싶은 우리 모두가 이렇게 덕담을 건낸다.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밥의 즐거움을 골고루 받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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