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社會學을 체계화한 法學者, 張庚鶴
法社會學을 체계화한 法學者, 張庚鶴
  • dvoice
  • 승인 2014.01.05 14:4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권용우(명예교수 ‧ 법학)

 

 

 

法社會學을 체계화한 法學者, 張庚鶴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오는 2월 26일. 이 날은 의당(義堂) 장경학(張庚鶴)의 2주기(週忌)가 되는 날이다. 의당은 1916년 2월 27일 함경남도 문천군(文川郡) 명귀면(明龜面) 수치리(秀峙里)에서 태어나 2012년 2월 26일 95세로 영면하였다.

      그가 어린 시절 자랐던 고향마을은 남쪽에는 해발 700m의 봉황산(鳳凰山)이 우뚝솟아 있어서 이곳에 올라 동해(東海)를 내려다보면 푸른 물결이 춤을 추고, 서쪽에는 금강산(金剛山)으로 뻗어내려가는 산줄기가 마치 병풍처럼 높게 둘러쳐 있어서 아늑함을 더해주었다. 어디 그 뿐인가. 북쪽에는 넓게 펼쳐진 평야가 언제나 그의 마음을 풍요롭게 하였다. 그는 이러한 천혜(天惠)의 자연을 벗하여 유소년시절을 보내면서 대법학자(大法學者)의 꿈을 키워갔다.

 

      文學에 깊이 빠지다

 

      의당은 1923년 일곱 살이 되던 해 4월에 집 근처에 있는 수치(秀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체계적인 신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 해 3월에 창간된 소년잡지「어린이」를 구독하였다. 1928년, 6학년이 되면서 여러 종류의 나폴레옹(Napoleon Ⅰ) 전기(傳記)를 읽으면서, 문학의 소양을 키워갔다.

      의당이 문학에 몰입하게 된 것은 일본 마쓰야마(松山)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이다. 그는 이때 교과서 외에 괴테(Goethe, J. W. von)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같은 소설류와 빈델반트(Windelband, W.)의 『독일철학사』, 에커만(Eckermann)의 『괴테와의 대화』 등의 다양한 교양서적을 읽으면서 지식을 넓혀나갔다. 이 외에도 일본 중앙공론사(中央公論社)에서 매월 1책씩 출판하는 톨스토이(Tolstoi, L. N.) 전집(全集)을 탐독하였다.

 

      의당은 이토오 다스오(伊藤達夫) 교수와 함께 도오고(道後) 온천에서 눈 속에 피는 빨간 동백꽃을 감상하면서 문학을 얘기했다고 하니, 참으로 낭만스럽지 않는가. 그리고, 동양사(東洋史) 교수인 우에무라 세이지(植村淸二)도 문필가로서 의당에게 문학적 영향을 많이 주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로 미루어보면, 학창시절에 어떤 은사를 만나느냐 하는 것이 자신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이 참으로 크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의당은 이러한 학교생활을 통해서 문학도로서의 꿈을 키워갔으며, 기숙사 회지 「료」(寮)에 수필 “척제”(拓堤)를 발표하였다. 다쿠데이(拓堤)는 기숙사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강둑인데, 그는 이곳을 즐겨 산책하면서 사색에 잠기곤 했다.

 

      의당은 대학진학을 앞두고 많은 고민에 빠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독문학(獨文學)을 전공해서 장차 작가가 되려고 했지만, 선배들의 조언에 따라 독문학 전공을 단념하고 법학을 전공하기로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당시 사회사상(社會思想) ‧ 철학(哲學) 분야에 저명한 교수가 많이 재직하고 있는 교토(京都)제국대학 법학부에 진학하여, 법학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法社會學에 몰두하다

 

      교토는 일본의 고도(古都)로서, 사원(寺院) ‧ 누각(樓閣) 등의 왕조문화(王朝文化)의 흔적이 많은 도시이며, 산수(山水)가 수려한 곳으로서, 문학에 관심을 가진 의당에게는 학구와 사색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런데, 이 무렵 의당에게는 견딜 수 없는 찬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1940년, 일제(日帝)가 일선융합(日鮮融合)이니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운 기만적 동화정책(同化政策)을 펴면서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더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폐간하는 조치를 취했다. 일본 땅에서 이 소식을 접한 의당의 마음은 착잡하기 짝이 없었다.

      의당은 이러한 민족수난(民族受難)을 지켜보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한 없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그리고, 법학도의 머리 속에 맴도는 정의(正義)와 현실(現實)과의 괴리현상을 피부로 느끼면서 유학생활을 이어갔다. 참으로 괴로운 나날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절박한 상황이 도리어 그로 하여금 법학에 정진하게 하였다.

 

      의당은 이러한 심리적 갈등을 가슴에 품은 채 교토생활을 마무리하고 해방과 함께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그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1946년 9월, 부산에서 새로 신설된 동아대학(東亞大學)에서 민법(民法) 강의를 시작하게 되고, 이로써 강의와 연구에 몰두하면서 한국민법학의 초석을 굳건히 다져나갔다. 그의 저술은 민법분야의 『현대 민법총칙』을 비롯해서 30여권을, O. W. Holmes Jr.의 『Common Law』를 비롯해서 8권의 번역서를 남겼다. 특히, E. Ehrlich의 『Grundlegung der Soziologie des Rechts』와 M. Weber의 『Rechtssoziologie』를 번역, 출간한 것은 그의 법사회학(法社會學)에 대한 관심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평소 판례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많은 판례평석을 발표하였다. 그는 판례평석을 하기 위해서 판결문을 읽으면 “원 ‧ 피고가 법정(法廷)에서 서로 다툰 구체적 사실관계가 모두 생활현실과 밀착되어 있고 판결문에는 승소한 사람의 즐거움과 패소한 사람의 억울함이 교차하는 장면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것이 인생의 한 단면”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를 통해서 ‘법리(法理) 속의 인간’을 발견하게 된다고 했다.

 

      의당은 자신의 문학적 소양을 법학과 접목시켜서 그의 특유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그의 박사학위논문이 그 대표적인 결과라 할 수 있는데, ‘춘향전(春香傳)에 나타난 법의식(法意識)’을 중심으로 “이조(李朝) 후반기의 법사상(法思想)”을 조명하고 있다. 이는 춘향전이 쓰여진 영 ‧ 정조(英 ‧ 正祖) 시대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양반과 서민의 법에 대한 의식을 발견하려는 것이 그 연구의 목적이었을 것이다.

      의당은 고전적 시대소설인 춘향전에 대한 법사회학적인 접근을 통해서 유교(儒敎)의 정치이념과 유교정신을 내포하는 법제도를 분석하였다. 그리고, 춘향전에 나타난 양반계급의 폭정에 대한 항거와 계급타파를 부르짖는 서민들의 의식을 통해서 그들의 법의식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였다.

      의당은 이러한 학문적 사고의 바탕 위에서 법사회학에 관한 논설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발표함으로써 ‘살아 있는 법’(lebendes Recht)의 발견에 온 힘을 기울렸다. 그의 이러한 학문적 업적이 후학들에 의해서 더욱 알차게 열매 맺기를 기대하면서 이 글을 맺는다.

dvoice
dvoice 다른기사 보기

 dkdds@dankook.ac.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