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族史學의 큰 별, 洪以燮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민족사학(民族史學)의 큰 별, 홍이섭(洪以燮) 박사의 일생” - 이는 1974년 3월 5일, 어느 일간신문이 홍이섭 교수의 타계소식을 전하는 기사의 제목이다. 이 신문은 “한국 정통사학(正統史學)의 마지막 빛이었던 홍이섭 박사(60)는 일제(日帝)가 왜곡한 민족역사(民族歷史)를 바로잡는 국사(國史) 체계화의 마지막 마무리를 눈앞에 두고 세상을 떠났다”고 애석해 했다.
植民史觀의 克服에 온 힘을 쏟다
홍이섭. 그는 1914년 12월 6일 서울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배재고보(培材高普)와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를 졸업하고, 1974년 3월 4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학문의 길에서 평생을 보냈다. 그리고, 그는 사상사(思想史)와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에 임했는데, 특히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사학을 뚜렷이 하려는 목표로 일관했던 것 같다. ‘식민사관(植民史觀)의 극복과 민족사관(民族史觀)의 확립’이 그의 확문의 목표였다.
이러한 그의 민족사학의 뿌리는 아마 배재고보와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의 은사인 한뫼 이윤재(李允宰) ‧ 호암(湖巖) 문일평(文一平) ‧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 용재(庸齋) 백낙준(白樂濬) ․ 외솔 최현배(崔鉉培) ․ 남창(南倉) 손진태(孫晉泰) 등에게 수학하면서 민족사학에 눈을 뜬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감수성이 예민했던 배재고보 재학시절 한뫼의 조선어문법(朝鮮語文法), 호암의 조선사(朝鮮史) 강의를 들으면서 ‘민족의식’(民族意識)에 눈을 떴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해서 위당의 강의와 그가 신문 ․ 잡지에 발표한 논설을 통해서 홍이섭의 민족사학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홍이섭은 입버릇처럼 위당을 “평생 생각하여야 할 한 분의 선생님”으로 추앙했다고 하니, 참으로 위당으로부터의 감화가 컸던 것 같다. 이에 더하여, 위당의 강의를 통해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의 민족주의 역사학(이른바 ‘丹齋史學’)을 전수받았던 것이, 크게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또, 홍이섭은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의 사관(史觀)을 추앙하였다. 그는 백암의 「한국통사」(韓國痛史)와 「한국독립지혈사」(韓國獨立之血史)를 바이블처럼 생각하면서 민족사관의 확립에 심혈을 기울렸다. 홍이섭의 이러한 학문적 자세는 그의 저서 「한국사의 방법」(탐구신서 35, 1968)에서 찾을 수 있다.
홍이섭이 민족사학에 눈을 뜨게 된 또 하나의 계기는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 조풍연(趙豊衍) ․ 신백수(申百秀) 등과「삼사문학」(三四文學) 동인으로 활동하는 동안 이들 동인들과 문학 이야기와 시대의 울분을 토로하면서 항일사상(抗日思想)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그의 사상을 배경으로 형성된 학문의 영역이 민족사학으로 태동하여 한국현대사 ․ 한국정신사로 맥을 이어갔다. 그 결과, 1968년에 「韓國史의 方法」, 1975년「韓國精神史 序說」을 낳게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홍이섭은 민족의식의 바탕 위에서 식민사관의 극복을 위한 논설을 많이 발표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구한말(舊韓末) 국사교육과 민족의식” “식민지적 사관의 극복” “민족사학의 과제” “민족자주사관의 확립” “민족사관의 문제점” “한국사관 정립의 가능성” 등이 그것이다.
또, 홍이섭은 이러한 학문적 토대 위에서 많은 논설을 발표하였는데, 그는 이를 통해서 우리 민족이 서야 할 자리, 그리고 앞으로 걸어나가야 할 길을 제시하였다고 한다(황원구 “사학자 洪以燮”).
朝鮮後期 實學思想의 硏究에 몰두하다
홍이섭은 초기에는 과학사(科學史)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는데, 1942년 「朝光」에 “조선과학사”를 연재하였다. 그 결과, 1944년 「조선과학사」(朝鮮科學史)를 일본 도쿄(東京)에 소재한 삼성출판사에서 출판하였으며, 이 책은 1946년에 정음사에서 국역판으로 출간된 바 있다. 그런데, 그 당시로서는 미개척 분야의 시도로서 한국과학사에 기념비적인 저서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 그가 조선과학사를 집필할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이에 대한 연구가 대단히 미진한 단계이었으므로, 이를 체계화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그는 정음사의 국역판 ‘서언’에서 “… 이 소책자는 조선사(朝鮮史)에서 본 과학사의 시험적 구상이기로, 엄밀한 의미로 과학사로서의 체계화는 뜻있는 이들의 공동연구로써 비로소 이루어낼 수 있을까 한다”라고 적고 있다.
그 후, 홍이섭은 조선후기의 실학사상(實學思想) 연구에 심혈을 기울렸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다산학(茶山學)에 깊이 매료되었던 것 같다. 그의 이러한 관심은 연희전문학교 재학시절인 1936년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서세(逝世) 100주년 기념행사를 직 ‧ 간접으로 접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그 결과, 1959년에 박사학위논문 「丁若鏞의 政治 ․ 經濟思想 硏究」로 다산학을 정리하였는데, 이로써 이 분야의 독보적인 발자취를 남겼다.
홍이섭은 다산의 저서 중 「목민심서」(牧民心書)와 「경세유표」(經世遺表)를 통해서 다산의 경제사상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 다산학의 새로운 연구방향을 제시한 것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산학 연구를 토대로 하여 조선후기의 실학사상 연구에 심혈을 기울렸다. 그 결과, “한국의 사상가” “한국정치사의 방법과 과제” “단재 신채호” “호암 문일평” “위당 정인보” “사관(史觀)의 빈곤을 극복하는 길” “한국 사회사상사(社會思想史)의 방법” “오늘의 한국사회상” “한국유학사연구의 현재적 기점(起點)” 등의 논설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홍이섭의 사학(史學)은 한국근대사로 이어졌는데, 이에 대한 연구업적은 그가 타계한 후 1975년 연세대학교 출판부에서 「한국근대사」와 「한국정신사 서설」로 빛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학문적 업적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홍이섭의 삶과 역사학」(毋岳史川 제1집, 1995)으로 편찬되어 후세에 전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014년 3월 4일, 이 날은 선생의 40주기(週忌)가 되는 날이다. 부디 천상(天上)에서 명복(冥福)을 누리시기를 빌면서, 이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