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悳祐, ‘漢江의 奇蹟’을 이끌다
南悳祐, ‘漢江의 奇蹟’을 이끌다
  • 권용우
  • 승인 2014.04.03 0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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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悳祐, ‘漢江의 奇蹟’을 이끌다

 

권 용 우

<명예교수 ‧ 법학>

 

 

 

오는 5월 18일은 1960~70년대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끌었던 남덕우(南悳祐) 전 국무총리의 1주기(週忌)가 되는 날이다. 그는 2013년 5월 18일 향년 89세로 영면하였다.

 

輸出 중심 ‧ 先成長 後分配 실천

 

남 전 총리는 1969년 10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으로부터 재무부 장관 임명장을 받으면서 경제선장(經濟船長)으로 정부에 첫 발을 들여놓았다.

이 때, 박 대통령이 임명장을 주면서 남 장관에게 농담 섞어 건넨 말이 오랜 기간 동안 시중에 회자되었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았다. “남 교수, 그 동안 정부가 하는 일에 비판을 많이 하던데, 이제 당신도 좀 당해봐”(조선일보 2013. 5. 20).

 

남덕우는 그로부터 4년 11개월간 재무부 장관을, 4년 3개월간 경제기획원 장관 겸 경제부총리를 역임하면서 경제성장을 이끌어갔다(그 후, 대통령 경제특보, 국무총리 및 한국무역협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수출(輸出) 중심 ‧ 선성장(先成長) 후분배(後分配)’를 이론적 기반으로 하여 박정희 정부의 개발연대(1965~79년)의 중심에서 원칙을 지키면서 뚝심을 보였다. 이 때,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고도성장을 기록하였다. 폭풍과 파도를 뚫고 달려온 긴 항해였다. 그에게는 밤과 낮이 따로 없었다.

1971년에 ‘수출 10억 달러 달성’을 시작으로 해서 1977년에는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하였다. 이는 추석과 설 연휴만 쉬면서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한 ‘공돌이’와 ‘공순이’로 불리었던 산업역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자주(自主) ‧ 자립(自立)의 기치를 높이 들고 개방형 수출구조로 전환한 지도자의 추진력과 이를 이끌어간 경제선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 무렵, 우리나라 경제패턴의 대전환을 맞는다. 1973년 1월 12일, 박정희 대통령이 연두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重化學工業化)를 선언한다. 이 선언은 경공업과 가공제품의 수출만으로는 경제를 더 이상 발전시킬 수 없으며, 산업국가로의 발전을 이룩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국가안보(國家安保)를 위한 방위산업(防衛産業)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전제이기도 하였다.

 

重化學工業 육성, 經濟의 未來像 제시

 

이러한 정부의 방침에 따라 ‘중화학기획단’(重化學企劃團)이 만들어지고, 이어서 자금 동원, 공업단지 조성, 투자 ‧ 생산 및 수출계획이 수립된다. 그리고, 철강 ‧ 전자 ‧ 화학 ‧ 조선(造船) 등이 전략적으로 보호 ‧ 육성할 중화학산업(重化學産業)으로 선정되고, 이에 참여할 기업도 지정된다.

그 당시, 이에 참여한 기업들에게는 많은 인센티브가 주어졌으며, 그리고 그들 기업들은 회사의 운명을 걸고 중화학산업에 투자하고 수출에 올인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가 경공업과 수출주도형 경제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의 산업화로 넘어가는 징검다리였다. 이 단계를 슬기롭게 헤쳐나감으로써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경제발전을 이룩하였다.

 

이를 우리는 ‘한강(漢江)의 기적’이라고 말한다. 이 ‘한강의 기적’은 박정희 대통령과 남덕우와의 만남의 결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남 전 총리는 조화롭게 이끌어가는 리더십을 갖고 있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그런 지혜를 가진 남 전 총리를 신뢰했던 것 같다.” 이는 남 전 총리가 재무부 장관을 물러나 경제부총리로 자리를 옮길 때 그 후임으로 재무부 장관을 맡았던 김용환 새누리당 상임고문의 말이다.

 

남덕우! 그는 “‘경제발전을 통한 빈곤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가슴 벅찬 비전을 현실로 옮긴 탁월한 정책설계자”였다(한덕수 한국무역협회장 ‘추도사’ 중에서).

그는 대한민국의 경제개발의 주춧돌을 놓은 경제발전의 주역이었다. 그리고, 비전을 현실로 바꾸어 놓았다. 이러한 터전 위에서 오늘의 대한민국이 건설된 것이다.

 

2010년에는 G20 정상회의(頂上會議)를 개최하고, 그 의장국으로서 당당하게 세계무대의 중심에 서지 않았던가. 또, 2011년에는 경제협력기구(OECD)의 개발원조기구(DAC)에 가입함으로써 역사상 처음으로 원조를 받던 나라가 원조를 주는 나라로 바뀐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2011년 12월 5일에는 연간 무역(貿易) 1조 달러를 달성함으로써 이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무역 아홉 번째의 국가’로 우뚝 선 것이다. 또, 2012년 6월 23일에는 ‘20-50 클럽’에 가입하였다. 지금까지 ‘20-50 클럽’에 가입한 국가는 일본(1987년) ‧ 미국(1988년) ‧ 프랑스(1990년) ‧ 이탈리아(1990년) ‧ 독일(1991년) ‧ 영국(1996년) 등 6개국이었는데, 우리나라가 일곱 번째로 가입하게 된 것이다. 여기 ‘20-50 클럽’은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인구 5,000만 명을 동시에 충족하는 나라를 뜻하는 것인데, 우리나라는 2012년 6월 23일에 1인당 국민소득 2만3,680 달러, 인구 5,000만 명을 충족한 것이었다.

 

이 모두가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고 잘 살아보겠다는 1960~70년의 개발연대(開發年代)의 주춧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할 때면, 우리는 언제나 탁월한 경제리더였던 남덕우를 떠올리게 된다.

남 총리님! 부디 천상(天上)에서 명복을 누리옵소서.

권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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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k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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