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말하라고 하면 뭐라고 해야 할까? 기쁨이라고 할까, 슬픔이라고 할까. 행복이라고 할까, 불행이라고 할까.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그 속에 흐르는 인생은 기쁨이라기보다 슬픔에 가깝다. 행복이라기보다 불행에 가깝다.
열 살의 소년 모모는 95kg의 육중한 체구를 오직 두 다리로 지탱하며 날마다 7층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는, 늙고 뚱뚱한 로자 아줌마의 집에서 살고 있다. 로자 아줌마는 전직 거리의 여자였지만 늙고 뚱뚱해진 지금은 매춘부의 아이들을 돌봐주면서 우편환을 받고 살았다. 모모는 아줌마가 불쌍했다. 그래서 ‘생이란 것이 아줌마를 엉덩이로 걷어차 버렸다’고 생각했다. 여섯 살 때인가, 로자 아줌마가 월말마다 받는 송금수표 때문에 모모를 보살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모모는, 밤이 새도록 울고 또 울었다. 모모는 아줌마가 모모를 사랑했기 때문에 보살펴준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생애 최초의 슬픔이었다.
모모의 친구는 양탄자 행상을 하는 여든 살이 넘은 아랍인 할아버지다. 모모는 타밀 할아버지에게 묻는다.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할아버지는 ‘그렇다’고 대답하며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인다. 그 대답이 너무 슬퍼서 모모는 울기 시작한다. 모모는 할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꼭 “하밀 할아버지! 하밀 할아버지!”하고 부른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 아직도 누군가 할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할아버지에게는 이름이 하나 있고,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드리기 위해서다.
로자 아줌마가 아프자 그녀에게 아이들을 맡기려는 사람이 없어진다. 살길이 막막해진 아줌마는 붉게 화장을 하고 입술을 야릇하게 실룩대며 손님을 끌곤 한다. 모모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로자 아줌마를 찾아온다. 그리고 로자 아줌마에게 주어진 마지막 희망이었던 모모까지 빼앗아버리려 한다. 모모는 그 사람의 아들이길 거부한 채 로자 아줌마 곁에 남는 것을 택한다. 그때 모모는 알게 된다. 자신은 10살이 아닌 14살이라는 것을... 왜 나이를 속였느냐고 모모가 묻자 로자 아줌마는 대답한다. “네가 내 곁을 떠날까 봐 겁이 났단다.”
로자 아줌마의 병이 깊어진다. 죽음 직전에 놓인 로자 아줌마를 위해 모모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모모는 그녀가 독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겪었던 끔찍한 고통을 피하기 위해 유일한 안식처로 마련해둔 지하실로 로자 아줌마를 힘겹게 모시고 간다.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였다. 로자 부인이 죽어가는 동안 모모는 지하실 방에서 향수를 뿌려주고 침대 곁에 남아 있었다.
로자 아줌마의 인생은 두려움 투성이었다. 가난, 질병, 늙음. 그런 두려움들이 과연 그녀만의 것일까. 무섭다는 것은, 두렵다는 것은, 불안하다는 것은 "바로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모모는 말한다. 늙은 하밀 할아버지를 위해 아직도 그를 기억하는 이가 있으며 그를 사랑하는 이가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던 모모. 사랑하는 로자 아줌마가 죽어갈 때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서 괴로웠던 모모. 로자 아줌마를 사랑했기에 그녀의 밑을 닦아주고 썩어가는 시체에 화장을 해주고 향수를 뿌려줬던 모모.
모모에게 펼쳐진 생은 즐겁고 아름답지 않았다. 아픔과 상처와 눈물이 어린, 고달픈 생이었다. 그러나 모모는 말한다. 인생은 두렵고 슬프다고. 그러니까 사랑해야 한다고. 자기 앞에 펼쳐진 생이 그 어떤 생이든 사랑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그러니 두려울수록 온 마음으로 더 사랑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