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로운 풍자로 일제를 비난하다
날카로운 풍자로 일제를 비난하다
  • 유정호 칼럼리스트
  • 승인 2019.11.26 14:32
  • 호수 146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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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이상재(1850~1927)
▲ 종묘 앞 이상재 선생 동상
▲ 종묘 앞 이상재 선생 동상

100년 전 이념․종교를 넘어 민족을 하나로 결집한 이상재 선생(이하 선생은 생략)의 동상이 종묘 앞에 있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심지가 곧았던 그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온갖 부정비리로 가득한 과거시험을 보며 입신양명을 깨끗하게 포기했다. 이후 개화파 인물이던 박정양의 집에서 10년 동안 기거하며 견문을 넓혀갔다.
박정양을 따라 일본에 도착한 이상재는 과거의 악습을 철폐하며 서구 문물을 도입하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또한 홍영식과 김옥균을 만나며 조선에 변화와 개혁이 필요함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이후 박정양의 도움으로 미국을 방문해 식견을 넓힌 이상재는 학문 국장이 돼 새로운 세상을 이끌 인재양성에 힘썼다. 또한 독립협회의 주역으로 자주 국권, 자유민권, 자강 개혁을 주장하며 독립신문 발행 및 독립문 건설에 힘을 기울였다.


이런 활동은 수구 세력의 미움을 받아 1902년에 국체 개혁 음모죄로 아들과 체포돼 수감됐다. 감옥에서 기독교를 접하고 개종한 이상재는 YMCA 교육부위원장을 맡는 것을 필두로 일제강점기에 일본 YMCA와 별도로 한국 YMCA를 세계 YMCA에 가입시키면서 한국이 독립된 나라임을 세계에 보여줬다.


이상재는 교육과 강연을 통해 청년들을 깨우치고, 일제의 식민지화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모든 힘을 기울였다. 특히 이상재는 풍자적인 말로 청년들이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쉽게 설명했고, 일제 관료나 친일파들을 꾸짖었다. 그랬기에 이상재의 말은 당시 우리 민족에게 통쾌함과 함께 나라를 잃어버린 설움을 해소해주는 청량제 역할을 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조선미술협회 발기식에서 “대감들께서도 동경으로 이사 가시지요. 대감들은 나라 망하게 하는데 천재들이니 동경으로 이사하시면 일본도 또 망할 게 아니겠소”라며 이완용과 송병준을 공개적으로 망신을 준 사건이다. 이처럼 이상재는 친일파와 일제를 꼼작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일제는 이런 이상재를 제거하고 싶어 했지만,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어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다. 일제가 속을 끓일수록 이상재의 말과 행동은 많은 이들에게 더욱 큰 용기와 희망을 줬다.


1927년 좌우익으로 나뉘던 독립운동이 하나로 합쳐지는 과정에서 신간회가 설립됐다. 이때 좌우익을 넘어서는 인물, 모든 이들이 존경하고 따를 수 있는 인물, 신간회를 짧은 시간에 각인시킬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 이상재가 회장으로 추대됐다. 당시 거동도 하기 힘들 정도로 쇠약했던 그였지만, 독립을 위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수락했다. 그 결과 신간회는 출범할 수 있었고, 이상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을 다 한 듯 신간회 창립 한 달 뒤에 순국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반이 돼줄 것을 요청받았으나, 자신마저 조국을 떠나면 조선 안의 동포가 불쌍하다며 남았던 이상재 선생이 청년들에게 했던 말은 지금의 청년들도 되새겨 볼만 하다. “결국 세상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니…. 이 불량한 것을 능히 다 통일해서 안정되게 만들 사람은 조선 청년에게 있으니 그것에 내가 제일 큰 희망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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