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넷이 광역화된 지금, 웹(WEB) 속에서 익명을 빌려 자신의 의견을 표출해보지 않은 이는 드물다. 발언의 유형은 다양하다. 누군가에 대한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새로운 사실이나 본인의 경험 등을 공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차마 실제 입 밖으로는 꺼내지 못했던 발언들이 쏟아지기도 한다. 그렇다. 사실은, 끔찍할 정도로 더럽고 질 나쁜 이야기들이 익명 뒤편에 레드오션을 이루고 있다.
◇ 자신의 주장을 공고히 할 때, 흔히들 ‘이름을 건다’, ‘성을 간다’고 말한다. 단순한 비유지만 실명이 가진 힘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상호 간의 존중과 예의가 규칙처럼 존재하는 이 사회에서 실명을 걸고 근거 없는 무례한 비난을 쏟아낼 사람이 있을까. 결국 익명 속 사람들이 갑자기 악해진 것이 아니라, 사회적 거름망을 거치지 않은 본성이 나온 것뿐이다.
◇ 오래전 사그라들었던 마녀재판이 신세기에 맞춰 새롭게 부활했다. 익명의 무리는 대중적으로 실명이 알려진 이들이라면 이유를 불문하고 도덕성을 재단했다. 공인의 해명과 사과는 외면받았으며, 그들의 갱생과 회개는 존재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극단적인 결말을 맞고 나서야 그 과정은 끝이 난다. 그러나 익명으로는 누구한테도 책임 소재를 물을 수 없다. 결국 이 사건은 대상만 바뀐 후 다시 반복된다.
◇ 여기서 익명의 이들에게 희극 ‘오셀로’의 데스데모나 문제가 발생한다. 최악의 상황을 직접 경험하는 것보다, 그를 상상하며 겪을 걱정과 불안 때문에 차라리 최악이 실현되길 바라게 되는 것이다. 가장 나쁜 일을 상정하고 이미 피해자의 위치에 본인을 대입한 인간에게는 최악의 사건이 발생해야만 본인이 결백해진다. 아내의 불륜을 확신하고 싶어 했던 오셀로처럼 말이다.
◇ 아마도 수많은 가해자가 이런 식으로 계속 자신에게 면죄부를 수여 해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면죄부가 일종의 면피임을 인정해야 한다. 용서는 일방적 행위가 아니기에, 상대가 온전히 당신의 말을 들어줄 수 있을 때야말로 진정으로 이뤄진다. 그래서 용서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어쩌면, 그 시기가 당신이 망설이고 있는 지금일지도 모른다.<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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