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겐 모름지기 필살기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 취업을 위한 면접 시간, 목차만 겨우 보고 온 과목의 중간고사 시험 시간 등이 아마도 그때일 터. 하지만 만약 제대로 된 한 방이 필요한 순간을 고르자면 이때가 아닐까? 바로 누군가와 ‘썸’ 탈 때 말이다. 내가 아는 어느 형님은 솔로 시절 기타를 무척 잘 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것도 한 곡만. 한 곡 정도야 조금 배우면 다 칠 줄 아는 거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 자고로 다 할 줄 아는 사람만큼 뭐 하나 제대로 하는 사람도 찾기 어려운 법이다.
대학 초년생 시절, 나도 나름의 한 방을 준비했다. 음, 기타나 피아노는 식상하니 넘어가고 그림 솜씨는 바닥이니 패스. 고심 끝에 내가 정한 무기는 바로 ‘파스타’였다. 파스타는 여러모로 필살기에 적합한 요리다. 저렴한 가격에 만들 수 있고 분위기마저 훌륭하니 말이다. 종류와 조리법이 다양하다는 점도 매력 중 하나. 라비올리, 토르텔리니, 라자냐 등 이게 무슨 면인지만 구분할 줄 알아도 꽤나 성공적이랄까?
구조주의의 눈으로 파스타 바라보기
이왕 종류 이야기가 나온 김에 구체적으로 파스타를 한 번 분류해 보자. 조금 색다른 방식으로 말이다. 내 기준에 따르면 파스타는 총 10가지로 분류된다.
① 대통령의 파스타 ② 방부 처리된 재료를 사용한 파스타 ③ 인간의 손으로 재배한 재료를 사용하는 파스타 ④ 베어 물면 쫄깃한 치즈가 배어 나오는 토르텔리니 ⑤ 파마산 치즈로 빚은 라비올리 ⑥ 대장간의 신 헤파이토스가 만든 파스타 ⑦ 이 분류법에 포함되는 파스타 ⑧ 기타 등등 ⑨ 퉁퉁 불어버린 파스타 ⑩ 멀리서 보면 만두처럼 생긴 파스타. …… 어라?
위의 기준은 보르헤스의 『픽션들』에 나온 동물 분류법을 파스타에 적용한 예다. 혹시 이 분류법에 빠진 파스타가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아예 없거나 아주 적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분류하고 나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씁쓸한 뒷맛은 뭘까? 그건 아마도 낯섦, 즉 위의 방식이 익숙하지 않은 기준으로 내용물을 담고 세계를 재단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위의 분류법이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른 구조를 지녔기 때문인 것. 이처럼 내용물 자체보다 그것을 재단하는 틀에 관심을 가지며, 그 틀이 우리의 인식을 지배한다고 여기는 사고를 ‘구조주의’라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기존에 가진 틀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기존의 틀은 정상적이고 문화적이며, 다른 틀은 이상하고 야만스럽다는 사고는 정말 옳은 것일까?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이 같은 물음에 대해 그런 사고야말로 이상하고 야만적이라 답한다. 그가 보기에 위의 분류방식이 불편한 이유는 우리가 지금까지 이런 방식으로 분류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푸코는 우리가 이러한 한계를 인정하면, 내가 그러니까 남도 마찬가지라는 ‘보편성의 개념’ 역시 한낱 허구에 불과해질 것이라 설명한다.
정상과 비정상 사이
살면서 우리는 ‘다른’ 이들을 종종 마주한다. 본질에 어긋나거나 휴머니즘에 배치된다고 여겨지는 이들의 행위에 대해 우리는 일탈 혹은 광기라는 꼬리표를 붙이며 당사자들을 감시하고, 격리하며, 배척한다. 좌우를 나눠 서로에 대한 증오와 반감을 드러내는 사람들, 몰이해를 바탕으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대하고 정책을 집행하는 사람들, 이주노동자에 대한 혐오감과 차별을 아무렇지 않게 표출하는 사람들까지. 그들은 ‘이상하기 때문에’ 배제되고 차별받아야 하는 대상인가?
푸코는 다양한 활동을 통해 권력이 소수자에게 가하려는 폭력과 격리가 얼마나 깊이 뿌리박혀 있는지 밝히려 했다. 흔히 창조는 ‘다름’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우리가 그토록 다른 것을 갈망하면서도 남과 다르지 못했던 이유는 어쩌면 이러한 다름을 차가운 눈길로 배척하고 제외하려 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