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은 비극을 낳는다
집착은 비극을 낳는다
  • 송정림 작가
  • 승인 2020.06.03 00:31
  • 호수 147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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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1327년 11월 어느 날, 아드소는 그의 사부인 윌리엄 수도사와 북부 이탈리아의 외딴 수도원에 들어간다. 세계 전역의 수도사들이 유학을 와있는 이곳에 의문의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윌리엄 수도사는 그 사건을 하나하나 풀어나간다.


수도사 윌리엄과 호르케는 첫 대면 때부터 대결한다. 그들은 아델모가 시편에 붙인 이 기괴한 삽화의 해석을 둘러싸고 논쟁이 붙는다. 호르케는 윌리엄 수도사에게 말한다. “황소를 데리고 토끼 사냥을 나가고, 올빼미가 문법을 가르치고, 개미가 송아지를 낳고. 도대체 이런 장난을 왜 합니까? 하느님의 뜻을 가르친다는 핑계 아래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과 거꾸로 된 놈의 세상이 있어도 좋다는 것입니까?” 


그러자 윌리엄 수도사가 대꾸한다. “하느님께서는 가장 왜곡된 것을 통해서도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호르케는 교회를 가리키며 그 대리석 부조에 그려진 우스꽝스러운 그림들을 잔뜩 비판하고는 말을 잇는다. “꼬리가 뒤틀린 요상한 점박이 괴물이나 보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그러다 최후의 날을 맞지 않도록 하세요!”


윌리엄 수도사는 모든 살인 사건이 수도원의 장서관에 숨겨진 비밀의 책,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부 <희극론> 때문에 일어난 것임을 알게 된다. “웃음은 권위를 비판하고 경건함을 조롱하며 절대성을 파괴한다.” 이것을 아는 호르케는 고대 철학자의 이 위험한 사상을 영원히 묻어두고자 했다. 웃음과 희극을 악마처럼 여긴, 장서관의 지배자 호르케 수도사.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에 책장에 독을 발라놓은 것이 죽음의 원인이었다. 모든 것을 알게 된 윌리엄의 추적으로 궁지에 몰린 호르케 수도사. 마지막 날 밤의 도서관의 밀실. 호르케의 기분 나쁜 목소리가 들려온다. “웃음은 농노들을 악마에 대한 공포에서 풀어줍니다. 그런데 이 책은 악마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되는 것이 곧 지혜라고 가르칩니다.”

호르케 수도사는 『시학』의 페이지를 뜯어 하나씩 불에 태운다. 윌리엄이 말리려 들자 호르케는 등불을 내던져 방에 불을 지른다. 윌리엄은 외친다. “서둘러라! 저 영감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다 먹어 치우겠다!” 그 불길로 수많은 장서들이 불타고 윌리엄은 사람보다 책을 구하기 위해 미친 듯 책들을 불길 속에서 구해낸다. 하지만 불길은 치솟아 불꽃이 사방으로 튀고 바람을 타고 수도원 전체로 번진 불은 삼일 밤낮을 계속 타오른다. 그 후 세월이 지나 그 수도원을 방문한 아드소는 이렇게 독백한다. “바빌론의 영화는 어디로 갔는가?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 뿐. 그 덧없는 이름 뿐.”


신념과 고집은 다를 것이다. 독단과 확신도 다를 것이다. ‘신념’은 내가 믿는 바를 확신하면서도 다른 의견을 수렴해 물음표를 찍어보는 단계를 거친다. 그러나 ‘고집’은 다른 의견 다른 생각에는 귀를 틀어막고 마음을 닫아버린다. ‘독단’은 일종의 기억의 고집이다. 내가 믿고 있는 바를 남들도 다 따라야 한다고 고집한다. 그러나 ‘확신’은 나 혼자 믿어도 좋은, 그러나 타인의 생각도 존중할 줄 아는 마음의 자세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는 독단,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 남은 해쳐도 좋다는 이기심, 변화가 두려워 그 자체를 거부하는 조바심. 그렇게 움켜쥔 채 놓지 않으며 집착하는 이름은 없을까? 그것이 언젠가는 지고 마는 장미일지도 모르는데 가시가 앙상한 그 장미를 꼭 쥔 채 놓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송정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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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kd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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