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르게 살아간다
다르게 살아간다
  • 송정림 작가
  • 승인 2020.06.17 19:05
  • 호수 147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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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 작가 헤르만 헤세
▲ 작가 헤르만 헤세

 

나르치스가 젊은 조교사로 있는 마리아브론 수도원에 골드문트가 신입생으로 들어온다. 첫 수업 시간에 수습 교사 나르치스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 골드문트는 깜짝 놀랐다. 선생은 어렸지만 아주 멋졌다. 나르치스의 날씬한 체격과 서늘하게 빛나는 눈매, 또박또박 분명하게 모음을 발음하는 입술과 날아갈 듯 지칠 줄 모르는 목소리에 골드문트는 기분이 좋아졌다. 


나르치스는 어두운 성격에 깡마른 체격이었다면 골드문트는 눈부시게 화사한 존재였다. 나르치스가 사변가요 분석가였다면 골드문트는 몽상가요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에게 빠져들었다. 그들은 성향이 다르고 가치관이 달랐다. 골드문트가 신앙보다 사랑의 방랑과 예술적 창조의 삶을 따라가는 타입이라면, 나르치스는 금욕과 신앙의 삶을 추구하는 타입이었다. 그런데도 둘은 가장 가까워진다. 


골드문트는 예민해진 감수성으로 몽상과 꿈의 세계에 몰입하게 됐다. 결국 골드문트는 관능의 세계로 빠져들어 수도원을 떠나며 나르치스에게 말했다. “내 가슴에 피어난 꿈처럼 갑자기 낯모르는 아름다운 여인이 다가온 거야. 그녀는 나에게 꽃다운 미소를 지어 보였고 나를 사랑해줬지. 입맞춤에 나는 몸속이 녹아내리는 듯한 야릇한 통증을 느꼈어. 지금까지 느껴온 모든 그리움과 꿈, 내 속에 잠자고 있던 온갖 달콤한 불안과 비밀이 깨어나서 모든 것이 변모하고 마치 마술에 걸린 것처럼 새로운 의미가 있게 됐어.” 그러면서 이제 수도원에 단 하루도 더 머무를 이유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마지막 순간에도 둘의 상황은 너무나 달랐다. 나르치스는 제단 앞에서 지친 무릎을 꿇고 정갈한 기도와 묵상으로 밤을 지새울 것이고, 골드문트는 이곳에서 도망쳐 그 어딘가에 있을 나무 밑에서 사랑을 찾아 그녀와 달콤한 동물적 유희를 다시 즐길 것이었다.


세월이 흐른 후 골드문트는 병든 몸으로 나르치스를 찾아온다. 죽음을 맞기 직전,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에게 고백한다. “내 생활의 절반은 자네의 사랑을 구하는 일이었네. 이제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이 순간에 유랑과 자유, 속세의 여인들이 나를 버린 지금에서야 나는 그 사랑을 받아들이네.”


골드문트는 수많은 사랑을 체험하는 동안 허망함의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속박받지 않는 무절제한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 고독의 쓰라림을 맛봐야 했고, 죽음을 방어하기 위해 굶주림과 추위에 떨어야 했다. 사랑이 슬픔이라는 것을 알지만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인생이 허망한 줄 알지만 그렇다고 도망치지도 않으면서 다가오는 모든 감정에 충실했다. 생의 한 가운데 뛰어들어 비가 내리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았다. 큰소리로 환호를 지르며 두 팔을 가득 벌려 그들을 안으며.


산다는 것은 결국 그런 것. 너덜너덜한 신발을 신고 숲속을 헤매다니는 것. 햇볕을 쬐고 비를 맞으며 배고픔과 고생을 겪어야 하는 것. 쾌락 이후에 괴로움으로 그 보상을 받아 가며 살아가는 것. 사랑은 환상이며 인생은 몽상에 불과하다고 해도 거기 풍덩 뛰어드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몽상가이며 또 다른 골드문트들이 아닐까.

송정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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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kddds@dankoo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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