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 전후의 파리. 나치 강제 수용소를 탈출해서 불법 입국한 독일의 외과 의사 라비크가 쓸쓸한 거리를 걸어간다. “사자는 영양을 죽이고, 거미는 파리를 죽이고, 여우는 닭을 죽이지. 그런데 세상에서 단 하나, 끊임없이 저희끼리 서로 전쟁하고 싸우고 죽이는 유일한 것은 무엇인가? 두말할 것 없이 만물의 영장, 인간이지.”
이렇게 전쟁을 혐오하며 무허가 수술로 생계를 꾸려가는 그에게 생의 목적이 하나 있다. 자신을 체포해 고문하고 옛 연인을 죽게 한 게슈타포 하아케에게 복수하는 것. 어느 날 밤, 우연히 센강에 몸을 던지려던 조앙을 구한다. 그리고 그녀를 극장식 주점인 세헤라자드에 취직시켜준다.
망명자들이 들끓는 호텔에서 연명해가는 임시 생활자인 그의 고독한 삶에 그가 즐겨 마시는 사과주 칼바도스의 향기와 같은 사랑이 스며든다. 그러나 라비크는 조앙에게 차갑게 대한다. 조앙이 “사랑이란 서로 속하는 거예요. 영원히”라고 하지만 라비크는 생각한다. ‘영원히라니 아이들이 읽는 옛날 동화로군. 단 몇 분도 붙잡아둘 수 없는데.’
라비크는 사고가 생긴 여자를 돕다가 불법 체류자임이 들통나서 조앙에게 사정을 알릴 사이도 없이 외국으로 추방된다. 그 사이에 조앙은 불안감으로 다른 남자를 만난다. 라비크는 두 달 만에 파리로 다시 돌아오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조앙에게 냉정하게 말한다. “당신은 너무 많은 종류의 사랑을 하는군.”
어느 날 조앙이 영화배우 남자가 쏜 총에 맞고 라비크는 급히 달려가 그녀를 수술한다. 그러나 이미 그녀를 구할 수 없는 상태였다. 조앙은 죽어가며 그에게 말한다. “당신이 처음 보았을 때 전 어디로 가야 할지 통 모르고 있었어요. 당신이 1~2년을 제게 주신 거예요.”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그녀에게 라비크는 얼음 같은 심장을 열어 고백한다. “당신은 늘 나와 함께였어. 내가 당신을 사랑했을 때나 미워했을 때나, 혹은 아주 무관심한 것처럼 보였을 때나 당신은 언제나 나와 함께였어. 당신이 없었더라면 나는 더욱더 외로웠을 거야. 당신이 나를 살아가게 한 거야.”
그동안 그들은 언제나 빌려온 언어로 서로 대화를 했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말로, 그들 각각의 모국어로 얘기하고 있었다. 언어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서로를 잘 이해하는 순간이었다.
조앙은 죽고 모든 것이 끝났다. 라비크는 불법체류자에 불법 의사로 체포돼 프랑스의 강제 수용소로 끌려간다. 그리고 트럭에 실려 등화관제 된 파리를 떠난다. 소설의 마지막은 이렇게 장식된다. ‘너무 어두워서 개선문조차 이제 보이지 않았다.’
트렌치코트의 깃을 올리고 칼바도스에 취한 채 파리의 거리를 걸어가는 그가 냉소 속에 숨겨진 따뜻함으로 전해준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은 등화 관제 된 광장을 걷는 일처럼 어둡고 캄캄한 일인지도 모른다고. 어두운 거리를 밝혀주는 것,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 그것은 사랑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