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 상자 속 코기토(cogito)를 고르다
데카르트, 상자 속 코기토(cogito)를 고르다
  • 이준형 칼럼니스트
  • 승인 2020.11.24 16:20
  • 호수 147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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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데카르트
▲데카르트가 껍질과 속을 분리한 귤
▲데카르트가 껍질과 속을 분리한 귤

 

겨울을 귤로 느낀다. 집에 돌아오는 밤, 몇 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는 노점에서 “귤 한 상자에 오천 원”이란 소리가 들리기 전까진 날씨가 아무리 추워도, 껴입는 옷이 아무리 많아져도 겨울이 왔다는 실감이 나질 않는다. ‘어이구, 저렇게 팔면 농사짓는 분들은 도대체 얼마를 받는 거야? 운송비도 안 나오겠네’란 걱정과 현실은 별개. 외침이 들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두 팔은 귤 한 상자를 안고 만다. ‘귤 하나에 하루 치 비타민이 다 들었다는데, 이 안에 귤이 최소한 100개는 들었을 거고, 하루에 하나씩만 먹으면 평소에 복용하는 비타민C보다 가격도 착하고 자연산이니 내 몸에도 크게 이득’이란 기대도 역시 현실과는 동떨어진 계산이다. 이 추운 날, 따뜻한 전기장판에 이불 덮고 누워 하루 종일 TV나 보고 귤이나 까먹는 것 외에 무슨 낙이 있겠나. ‘하루에 하나씩’이란 결심은 결국 입 안 가득 고인 침 앞에 바스러질 뿐이다.
 

단 하나의 귤 : 코기토(cogito)
하지만 이런 ‘종일 귤 생활’도 12월을 지나 차차 겨울 막바지에 들어서면서 조금씩 싫증이 나기 마련. 이틀이면 사라지던 귤 한 상자는 이제 사흘, 나흘을 지나 일주일이 다 돼도 줄어들 생각이 없다. 슬슬 기지개를 켜고 ‘귤 고르기’를 시작할 시간이다.
귤 고르기? 별거 아니다. 말 그대로 늦게 먹는 바람에 썩어가는 귤을 모조리 골라내는 작업을 말한다. 하얗게 곰팡이 핀 귤이 당사자는 물론이거니와 주변마저 썩게 만들 수 있기 때문. 귤을 고르는 작업은 상자 안의 내용물 모두 쏟아내기에서 시작한다. 신문지를 깔아 놓은 방바닥에 귤을 쏟은 뒤, 하나하나 확인해 멀쩡한 귤만 다시 박스 안에 넣는다. 어설프게 뒤적거리는 선에서 작업을 마치면 상자 깊숙이 있던 녀석이 사고를 치기 십상이다. 썩은 것들을 모두, 완전하게, 골라내는 것. 그것이 이 시점에서 귤을 오래도록 즐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멍하니 앉아 귤을 고르다 보면 이름 하나가 문득 떠오른다. 바로 썩은 귤을 골라내는 것처럼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 회의해야 한다고 여긴 근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다. 이 정신 나간 아저씬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이 꿈에 불과할지 모른다거나 악마에게 속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식 밖의 가설까지 세워가며 귤을 골랐다. 뭐, 의심과 회의를 통해 결코 의심할 수 없는 무언가에 도달하는 것이 학문의 시작이라고 여긴 사람이니 말 다 했지 않나?!


어쨌든 그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상자 속에 남은 단 하나의 멀쩡한 귤을 찾아냈다고 선언했다.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줄여서 코기토(cogito)라 불리며,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번역되는 유명한 명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과정을 거쳐 ‘내가 먹고 있는 이 귤의 새콤달콤함도, 내 앞에서 귤을 까먹는 네 존재도 의심할 수 있지만,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건 결코 의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두 개의 실체, 연장과 사유
멀쩡한 귤을 찾았으니 이젠 먹을 차례다. 귤을 먹으려면 당연히 껍질과 속을 ‘분리’해야 한다. 데카르트 또한 실체, 즉 변하지 않는 본질을 연장과 사유로 분리했다. 먼저 연장이란 공간을 차지하는 실체를 말한다. 만약 누군가 “어떤 물체의 실체는 연장”이라 말하면 그건 ‘그 물체가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의미다. 쉽게 우리의 ‘몸’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사유는 생각하는 성질이다.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점이 연장과 다르다. 우리의 ‘정신’이 여기 해당한다. 이렇듯 본질은 연장과 사유, 육체와 정신으로 나눈 그의 입장을 우리는 ‘심신이원론’이라 부른다.


그는 이후의 수많은 사상가에게 영향을 미쳤다. 칸트, 헤겔, 하이데거 등 이름 한번 들어본 철학자라면 모두 그의 철학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누군가는 심신이원론을 부정하거나 긍정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코기토라는 명제 자체를 언급하기도 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쳐 나갔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라는 말, 현대철학을 알고 싶다면 데카르트부터 알아야 한다는 말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 남은 귤 까먹으며 데카르트를 살펴보자. 이 글을 다시 읽어도, 아니면 다른 교양서를 읽어봐도 좋다. 이왕이면 다른 철학자보단 좀 더 꼼꼼하게 알아보자. 데카르트를 이해하는 건 철학을 넘어 오늘날 서양의 사고관을 이해하는 소중한 밑바탕이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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