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를 시대 배경으로 하는 장편 소설을 헝가리어로 번역할 때였다. 주인공들이 백범 김구 선생에 관해 이야기하는 장면을 번역하다가 조그만 해프닝이 발생했다. 함께 번역 작업을 하는 파란 눈의 교수가 ‘백범’이 성(Surname)이고 ‘김구’가 이름(Name)이냐고 질문을 한 것이다. 웃으면서 백범은 호이고 김이 성이고 구가 이름이라고 하면서 동양적인 문화인 호(號)에 관해 설명을 해줬다. 그런데 김구는 개명한 성명이었다. 아명은 창암이었고, 동학에 입교하면서 창수로 이름을 바꿨다. 또한 마곡사 승려로 있을 때 법명은 원종이었다.
백범 선생은 독립운동을 하면서 필요에 의해서 개명을 했지만, 예전 한국인들은 관습적으로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본명 이외에 성인이 된 후 이름인 자(字), 그리고 일상에서 편하게 부르는 호를 가지고 있었다. 국가에 공적이 있으면 시호(諡號)를 받았다. 이는 타인의 본명을 부르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성명이란 타인들과 그 사람을 구별 짓는 지칭이면서 동시에 그 사람의 표상이다. 또한 이름은 일반적으로 집안의 어른들이 지어주기 때문에 이름 속에는 육친의 사랑과 바람이 담겨 있다. 필자의 이름은 외조부께서 지어주셨는데, 손주에게 좋은 이름을 지어주기 위하여 매우 고심하셨다고 한다. 내 이름이 너무 투박한 것 같아서 연예인 이름처럼 날렵한 이름으로 개명하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내 이름에 대한 내력을 듣고서 잘못을 깨달았다. 이렇듯 모든 사람의 이름 속에는 엄청난 사랑과 간절한 바람이 담겨있다. 그러니 타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는 것이다. 옛사람들이 자나 호를 활용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필자는 어려운 일에 봉착할 때면 마음속으로 내 이름을 크게 불러보곤 한다. 그러면 가슴에서 따뜻한 힘이 솟아난다. 거친 세상에 나 혼자만이 아니라 나를 사랑해주는 분들이 함께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2년여의 세월을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최근에는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 확산으로 살얼음을 걷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번 학기부터 대면 강의가 시행되고 있으나 답답한 마스크를 벗지 못하고 있다. 정말 역대급 시련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내면에는 극심한 피로와 우울감이 쌓이고 있다. 그래서 요즘 들어 필자는 자주 내 이름을 불러보고 있다. 현재의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더 강한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한국인의 이름은 단순한 지칭이 아니다. 이름은 자신의 정체성이며, 육친의 사랑과 바람이며, 기운을 북돋아 주는 원천이기도 하다. 자기의 이름이 얼마나 소중한가. 한국인에게 올바른 삶이란 자기 이름처럼 살아가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