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여순 사건을 잊으면 안 되는 이유
우리가 여순 사건을 잊으면 안 되는 이유
  • 이정온·윤다운·윤성원 기자
  • 승인 2022.04.05 14:29
  • 호수 148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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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혀왔던 74년 전 학살의 역사
▲ 본지 실시 ‘여순 사건에 대한 재학생 인식조사’(2022. 03. 29~04. 03.) 일러스트 가애리 기자
▲ 본지 실시 ‘여순 사건에 대한 재학생 인식조사’(2022. 03. 29~04. 03.) 일러스트 가애리 기자

Prologue


역사를 보면 국가는 종종 잘못된 행동을 한다. 그리고 진실을 바로잡기보단 이를 왜곡하곤 한다. 진실 규명은 피해자들과 유족들의 상처 치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이렇듯 우리가 아픈 역사를 돌아보고 사실관계를 파악한다면 무심코 넘어갔던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다. 동백꽃처럼 붉은빛이 가득한 여수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지난 1월 21일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이하 여순위원회)가 출범했다. 본지는 여순 사건의 배경과 그 내막을 알아봤다.

 

붉게 물든 그날의 여순

여순 사건은 1948년 10월, 여수에서 주둔하고 있던 일부 군인들이 국가의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을 말한다. 오랫동안 ‘여순 반란 사건'이라 알려졌고, 지금은 ‘10·19 사건’ 또는 ‘여순항쟁’으로 불린다.


여순 사건은 1948년 ‘남조선노동당’과 ‘민주주의민족전선’의 대규모 파업과 ‘2·7 구국투쟁’을 시작으로 전개됐다. 2·7 구국투쟁은 유엔 임시총회에서 ‘한반도 내 가능지역 총선거안’이 가결, 남한이 5월 10일 단독 총선거를 치르기로 한 결정에 반대하며 일어났다.


파업 중 일부가 과격화돼 경찰과 물리적 충돌이 일어났고, 미군정 지역 내 반미 세력을 중심으로 그 충돌이 지속됐다. 이는 곧 제주 4·3사건으로 이어져 미군이 제주도 진압을 개시했다. 이를 계기로 5월 4일, 여수14연대(이하 14연대)가 창설됐다. 육군본부는 같은 해 10월 15~16일경 14연대의 제주도 파병 계획을 하달했다. 10월 19일, 그들이 제주도 진압을 반대하고 여수 읍내로 진격해 관공서와 주요 기관을 장악하며 여순 사건이 일어났다. 10월 20일 새벽, 14연대의 반란 소식이 상부에 전해졌고 미 군사고문단 수뇌부는 광주에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를 조직했다. 총 11개 대대가 진압 작전에 나섰으며 결국 정부는 10월 25일에 여수, 순천 지역에 대한 계엄령을 발효했다.


진압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까지 사살된 여순 사건은 10월 27일에서야 종결됐다. 이후 이승만 정부는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해 반국가활동을 규제하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했지만, 그 본질은 좌익 세력 탄압에 있었다. 호남지역에 내려졌던 계엄령은 다음 해 2월에야 해제됐다. 정부는 그 이후에도 강력한 반공 정책을 펼쳤고, 여순 사건 관련 인물을 모두 사살했다. 1948년 10월 19일부터 8일간 이어졌던 여순 사건은 막대한 인명·재산 피해와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남겼다.

 

▲ 외국인 특파원으로 현장에 있던 칼 마이던스 사진작가가 직접 촬영한 당시의 모습이다.
▲ 외국인 특파원으로 현장에 있던 칼 마이던스 사진작가가 직접 촬영한 당시의 모습이다.

 

여순 지역을 기억하는 방법

본지에서 실시한 「여순 사건에 대한 재학생 인식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38.1%가 여순 사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주로 학교 역사 수업 때 배웠다고 언급했다. 여순 사건에 대해 조금 알고 있거나 들어봤다고 답한 응답자는 42.8%, 전혀 모른다고 답한 응답자는 57.1%로 전혀 모른다고 답한 학생이 반을 조금 넘기지 못했다.


김시흥(물리·1) 씨는 “여순 사건이 4·3 사건의 배경이 됐다는 정도만 알고 있다”고 말했고 이정수(몽골·3) 씨는 “일어난 장소와 민간인이 희생됐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고 전했다. 반면 여순 사건이 배경이 된 국가보안법, 제주 4·3 사건에 대해서는 95.2%의 응답자가 안다고 답했다. 윤세은(환경자원경제·4) 씨는 “제주도에 가서 직접 관련 장소를 다녀와 알게 됐다”고도 답했다.


여순 사건은 오랜 기간 ‘국군 제24연대 반란’, ‘전남반란사건’으로 불렸다. 1976년에는 ‘여순반란 사건’으로 처음 교과서에 실렸다. 남해 6개 지역 주민들이 국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사건으로 인식한 것이다. 2018년 8월 남해 6개 지역 주민들이 시민사회단체 ‘여순항쟁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를 설립하며 여순 사건의 명칭에 대해 말을 꺼냈다. 여순 항쟁 연구가 주철희 박사(58)는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1948, 여순항쟁의 역사』에서 여순 사건은 ‘여순 항쟁’으로 불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건 당시와 달리 지금은 해당 사건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가장 큰 피해 지역이었던 여수와 순천을 줄인 ‘여순’ 명칭으로 인해, 이곳을 제외한 다른 피해 지역에 대한 인식이 미흡하다. 여순 사건의 피해 지역은 전남 18곳, 전북 2곳, 경남 1곳으로 광범위하다. ‘여순 사건 유족회’ 이규종 전 회장(76)은 “여순이라고 지역을 국한해 부르는 것보다 10·19사건이 올바른 용어”라는 입장을 밝혔다.

 

74년의 무게를 짊어진 그들

지난 1월 21일, 여순위원회가 출범하며, 진상규명 활동과 희생자 및 유족 신고가 시작됐다. 작년 7월 20일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여순특별법)이 공포된 지 5개월 만의 성과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영일 이사장은 ‘뿌리 깊은 적색 공포증’ 때문에 법 제정이 늦어졌다는 의견을 밝혔다. 여수·순천을 ‘적색 지대’로 표현한 이승만 전 대통령이 14연대를 반란군대로 낙인찍었고, 결국 특별법을 제정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게 됐다는 것이다.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 1기가 조직됐다. 그러나 5년의 활동 기간엔 추모 행사와 교육 행사만 활성화됐을 뿐, 핵심적인 진상규명과 체계적인 조사는 이뤄지지 못했다. 활동 종료 후 10년 동안은 진상규명 활동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2020년 12월,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진화위 2기의 활동이 시작됐다. 이처럼 진상 규명이 더딘 상황에서 여순위원회의 출범은 명예와 기본권을 침해받은 피해자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진상규명을 위한 한 걸음

여순위원회는 위원장과 5명의 정부위원, 9명의 민간위원으로 구성된다. 민간위원의 경우 유족대표, 법조계, 학계, 지역·시민사회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로 꾸려졌다. 또한 소위원회를 구성해 위원회의 심의·의결 대상 안건을 사전 검토 후 의결하도록 했으며 실무위원회는 결정의 집행력을 높이기 위한 사항을 여순위원회로부터 위임받을 수 있다. 체계적이고 객관적인 조사를 위해 실무위원회에 사실조사단을 설치했다.


여순위원회는 조사 종료 6개월 이내에 진상조사보고서(이하 보고서)를 작성 후 공개해야 한다. 추가로 보고서의 객관성 확보를 위한 진상조사보고서작성기획단을 운영하고, 위령 사업도 함께 진행할 계획이다. 실무위원회에서 신고를 접수하면 사실 조사를 토대로 희생자·유족 여부를 심사 후 희생자로 결정한다. 그 중 지속적인 치료나 간호가 필요하다고 신청한 사람에게 의료·생활지원금을 지급한다. 


이처럼 여순 사건의 배상은 모든 피해자에게 지급되지 않는다. 반례로 제주 4·3사건의 피해자는 올해부터 생활 및 의료지원금을 받는데, 이는 국가 잘못에 대한 기초적인 배상 조치다. 그렇기에 여순특별법의 개정 또한 필요하다. 현재는 신청자 중 심사를 통과한 일부에게만 배상 지원금을 주지만, 법 개정이 이뤄진다면 유족에 대한 일괄적인 지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신고 접수 과정에도 개선이 필요하다. 이 전 회장은 “유족을 알리는 신고서를 노인이 쉽게 작성할 수 있도록 개선했으면 한다”며 유족 대부분이 고령임을 고려해야 한다고 전했다. 이어 74년이 지난 사건이기 때문에 관련 피해 목격자가 매우 적은 상황이기에 보증인도 기존 2명에서 1명으로 줄였으면 좋겠다는 입장도 내비쳤다.


주철희 박사는 여순위원회가 가지는 궁극적 목적에 대해 “여순 사건 진상 규명과 피해자 명예 회복으로 인한 민주주의 발전 및 국민 화합”이라 말했다. 그는 왜곡됐던 여순 사건을 진상 규명한다면 민주주의 체제를 더 발전시킬 수 있다고 봤다.


이 전 회장은 “진상 규명 문제는 정권의 도움 없이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며 “민간단체에서 발버둥 쳐도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여순위원회는 반란군이라는 누명을 쓴 채 죽은 농민들과 그들 유족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고, 그들에게 국가적으로 사죄할 책임이 있다.

 

Epilogue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수면 위로 서서히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고 있다. 정치적 이유가 복잡하게 얽혀 벌어진 사건이지만, 우리는 사건 그 자체만을 바라봐야 한다. 70여 년 만에 어렵게 구성된 여순위원회는 희생자와 그 유가족의 오랜 억울함과 아픔을 풀어내는 데 집중해야 할 것이다. 여순 사건을 제대로 밝혀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 다시는 이런 역사를 반복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피해자들이 정당한 조치를 받을 수 있게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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