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경제학자 중의 하나인 케인즈는 영국 케임브리지셔에서 태어나 명문 이튼스쿨과 케임브리지 대학을 거치며 수학과 문학, 논리학 등 실로 다방면에서 천재적 기질을 발휘했다. 스승 알프레드 마셜의 권유로 케임브리지에서 경제학자가 됐지만 청출어람이런가! 스승의 학문적 성과를 넘어 거시경제학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창조해냈다.
1920년대부터 일찍이 자본주의의 불안전성을 간파하고 그는 정부의 적극개입을 주장했다. 1929년 대공황이 발생하고 미국에서 그의 이론에 기초한 뉴딜정책을 채택하자 그의 천재성이 입증되었다. 지난해 9월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으로 비롯된 금융위기가 세계경제에 공황의 그림자를 드리우자 신자유주의는 금융시장에 대한 지나친 자유방임으로 인하여 적절한 감독과 리스크 관리기능을 마비시켜 위기를 초래하였다는 점에서 ‘공공의 적’으로 내몰렸다.
지난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도 중국과 러시아 지도자들은 “시장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미국의 정책 실패가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했다”며 신자유주의를 맹공하였다. 1930년대 대공황 당시 존 메이너드 케인즈가 내놓은 처방은 정부의 적극적 개입이다. 시장이 제 기능을 못할 정도로 수요가 부진할 때는 정부가 예산보따리를 들고 시장에 직접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아담 스미스의 추종자들과 고전학파들이 지배했던 학계에서는 케인즈 이론은 신성모독에 버금가는 극약처방이었다. 그러나 그의 ‘극약처방’, 즉 적자예산을 감수한 재정확대는 대공황 당시 경제정책의 교과서가 되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행정부를 비롯한 각국정부가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재정투자를 통해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게 하였던 것이다.
"금리를 낮추면 기업의 투자가 증가한다." "중앙은행이 통화량을 늘리면 개인의 소비가 증가한다.""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고 하는 고전학파의 이론은 케인즈 시대에서 조차 자연법칙처럼 통용되었던 경제이론이었다. 그러나 대공황이 발생하자 이러한 이론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희망사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케인즈는 그의 명저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 1936)』에서 고전학파 '세이의 법칙(Say's law)'을 부정했다. 대신 그는 수요가 공급을 창출한다고 보았다. 또한 유동성함정에 갇히거나 경제전망이 비관적일 때는 투자의 이자율탄력성이 떨어져 금리를 0%대까지 낮춰도 기업은 투자를 기피하고 개인은 소비를 줄인다고 보았다.
따라서 경제성장의 동력은 공급이 아니라 수요라는 것이다. '케인즈경제학'은 반세기 가까이 경제이론의 경전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1970년대의 두 차례에 걸친 오일쇼크로 촉발된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인해 고용을 조절해 인플레이션을 조절할 수 있다는 케인즈의 이론체계는 그 빛이 바라기 시작했다.
나아가 기업과 개인은 물가상승을 전제로 반응하기 때문에 정부의 경기부양책이 무용지물이라는 합리적 기대가설로 무장한 시카고학파의 논리와 신자유주의의 발흥으로 인해 1980년대 이후 케인즈이론은 무기력증을 노출하였다.
그러나 기업은 앞 다퉈 감원을 하고, 은행은 문을 걸어 잠그고, 주식시장은 붕괴하고 여기저기서 비관자살이 잇따르는 등 '작은 정부'와 규제완화의 부작용이 글로벌 금융위기를 통하여 노정되면서 케인즈는 부활하여 다시 우리 곁에 돌아왔다.
1929년 대공황과 현재의 글로벌 경제위기는 판박이처럼 비슷하다. 현재에도 케인즈의 재정정책 처방이 다시 각광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1930년대의 세계 대공황의 상황에서 위기의 자본주의를 케인즈경제학이 회생시켰던 것처럼, 현재의 글로벌 금융위기로 다시 촉발된 자본주의의 위기를 케인즈경제학이 또 다시 부활시킬 것으로 기대된다.